탈북학자 김현식 미국 조지메이슨대 북한학 연구교수(80)는 요즘들어 북한 노동신문을 더 꼼꼼히 읽는다. 과거와 달리 북한이 개혁·개방에 나설 것임을 예고하는 내용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정은 체제’의 최고 실세로 부상한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어떤 개혁·개방 정책을 내놓고 있는지가 그의 최대 관심사다.

김 교수는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 부위원장의 자문역을 지냈다. 1992년 탈북 직전까지 북한 젊은층의 충성심 고취방안을 제시하면서 장 부위원장과 15년여 동안 1주일에 한 번꼴로 만난 사이다. 그는 “장 부위원장이 유학파 김정은을 잘 도와서 반드시 북한을 국제사회로 나오도록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교수는 북한의 교수 양성기관인 김형직사범대(옛 평양사범대)에서 1954년부터 38년 동안 러시아어 교수로 일했다. 김일성의 신임을 얻어 1971년부터 20여년간 김일성 처가 쪽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활동했다. 6개월 동안은 김정일에게 러시아어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1992년 탈북, 한국에서 지내다 2003년 미국으로 건너왔다. 예일대 북한학 초빙교수 등을 지낸 뒤 2007년부터 조지메이슨대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센터 북한학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최근 북한말 성경 편찬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자택에서 만났다.

▷북한말 성경이 무엇인가.

“성경을 북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번역한 것이다. 지난달 말에 첫 번째 분권으로 요한복음, ‘요한이 전한 기쁜 소식’을 완성했다. 평양 표준어를 기초로 번역했다. 신약은 예수 후편, 십자가는 십자 사형틀, 복음은 기쁜 소식 등 순 우리말로 풀었다. 북한은 1960년대 초에 시작된 언어혁명을 통해 어려운 한자어를 대부분 순우리말로 바꿨다. ”

▷성경 번역을 하게 된 동기는.

“북한 주민들을 전도하겠다는 목적이 전부가 아니다. 성경은 북한을 개방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정치색 없는 성경 말씀이 이념에 갇혀 있는 북한 주민들에게 쉽게 파고들 수 있을 것이다. 북한에 요즘 영어 열풍이 불고 있다. 북한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육 자료가 될 것이다. 러시아어에 기초한 영어문법책도 만들고 있다. ”

▷북한이 정말 개혁·개방에 나설까.

“그렇다. 김정은이 부인인 이설주를 공개하고 공식행사에 데리고 나오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김정은이 ‘나는 아버지와 다르다. 서구식으로 하겠다’는 신호를 국제사회에 분명히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노동신문을 매번 꼬박꼬박 읽으면 흐름을 읽을 수 있다. 무엇보다 김정은이 해외 유학파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게다가 북한 최고위층 가운데 서구문물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장 부위원장이 실세로 떠올랐다. 그는 친화력이 매우 강한 인물이다. 누구든지 한 번만 보면 호감을 갖게 된다. 북한 고위층 내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고 리더십도 있다. 장성택이 김정은을 잘 도와서 개방으로 방향을 틀면 북한은 크게 변할 수 있다.”

▷장성택과 친분이 있다던데.

“1974년부터 약 15년간 매주 한 번꼴로 만났다. 1977년 무렵 김일성의 사위이며 중앙당 청년사업담당 부장이었던 장성택이 3대혁명 소조를 각 대학에 파견하는 역할을 했다. 나에게 젊은층의 충성심 고취 방안에 대해
자문을 구했다. 한번은 장성택이 평양시 보위부장과 나를 만찬에 초대했다. 거기서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봤다. 식사 후 장성택은 ‘나는 김정일을 위해 저렇게 할복할 수 있다. 당신들도 그런가’라면서 김일성 일가에 충
성서약을 한 기억이 난다.”

▷김정일은 어릴 때 어땠나.

“김정일이 고3 때였다. 김일성이 “우리애가 러시아 회화실력이 부족하다”며 김정일을 개인지도하라고 했다. 김정일을 매일 고등학교 교장실로 불러 회화공부를 시켰다. 그는 숙제도 잘 하고 성실히 공부를 했다. 과외가 끝나고 헤어질 때는 소련제 초콜릿을 내 호주머니에 넣어줄 정도로 심성이 착했다. 그런 아이였는데 어떻게 폭력적으로 변했는지⋯.”

김정일 개인지도까지 했던 그의 인생은 동생을 만나러 미국에서 러시아로 찾아온 누나를 보면서 송두리째 바뀌고 만다. 한국 전쟁 때 헤어져 미국에 살고 있던 누나였다. 김 교수에게 망명을 제의한 남한 정보기관의 주선으로 성사된 만남은 북측 정보기관에 의해 발각됐다. 이내 그에게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긴급소환은 곧 처형을 의미했다. 소련 붕괴와 독일 통일을 보고 남북도 통일될 것으로 예상한 그는 망명을 결심했다. 그는 북한 정보망과 소련 국가정보기관인 KGB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6개월간의 은신과 비밀이동 끝에 남한에 도착했다.

▷김정일은 왜 개혁·개방을 못했나.

“여러 정황으로 판단하건데 김정일도 말년에 개방을 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방법을 알지 못했다. 개방을 하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 과제를 김정은이 떠안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북한이 본격 개방에 나서면 남북한 격차는 빠르게 좁혀질 것으로 본다. 그러나 개방 속도는 남한에서 기대하는 것보다 빠르지 못할 것이다. 남한은 북한이 국제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개방의 해법을 제공해줘야 한다.”

▷북한을 너무 옹호하는 것처럼 들린다.

“북한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북한을 사랑하는 것과 북한 정권을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다. 나는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우리 민족처럼 부지런하고 똑똑한 국민을 굶겨죽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을 분명히 해왔다.”

부인 김현자 씨와의 운명적 만남

北 교수·南 한복디자이너로 첫 대면…탈북 전부터 서로 돕다 '부부의 연'

김현식 미국 조지메이슨대 교수의 부인 김현자 씨(56)는 전통 한복 디자이너다. 과거 서울 청담동에서 명사들이 자주 찾는 고급한복 매장을 갖고 있을 정도로 한복 패션업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지금도 미국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자택 지하에서 한복 간이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나이 차이가 24살인 두 사람의 인연은 한 편의 운명적인 드라마와 같았다. 북한 최고위 엘리트였던 김 교수가 남한의 전도양양한 한복 디자이너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가을 탈북 1년여 전 러시아에서였다. 그는 북한에서 건너간 러시아국립사범대 교환교수였다. 당시 부인 김씨는 러시아에서 열린 남북 공동문화축제 한복패션쇼의 남한 대표로 참가했다.

김씨는 “김일성 배지를 단 교수님이 9박10일 행사기간 동안 러시아어 통역을 해줬는데 그게 인연의 끈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회고했다. 김씨가 그때 디자인한 한복들은 지금도 모스크바 ‘동방국가예술박물관’ 한국관에 진열돼 있다.

이후 1992년. 김 교수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탈북을 결정하게 된다. 그는 북한에 있는 가족과 제자들의 안전을 우려, 자신의 신분을 공개하지 않기로 남측 정보기관으로부터 약속받고 남한 망명을 결정했다. 웬걸. 남한에 도착하자마자 남측 정보기관은 신분을 언론에 공개하도록 그를 ‘협박’했다.

김 교수는 신원 공개를 거부한 채 단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러시아 행사장에서 만난 ‘한복 디자이너’를 찾아달라고 요청했다.

김씨는 “교수님이 미국에 사는 누님에게 억울함을 전하기 위해 편지 전달책으로 저를 찾은 것이에요. 러시아 한복공연 때 많은 분들이 교수님을 존경하는 것을 보고 훌륭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수님을 도와드리기로 했던 거죠.” 미혼이던 김씨와 탈북학자는 그렇게 사랑을 싹틔운 것이다.

워싱턴=장진모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