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뿐인 공간에 무수한 선들이 꿈틀대며 나른한 표정을 짓는다. 부옇게 비치는 빛 속에서, 검정 하양 빨강 파랑 선들이 속살속살 이야기하듯 이어진다. 곧 선을 타고 누군가 나타날 것만 같아 마른 침이 넘어간다.

‘볼펜 화가’ 이일 씨(60)가 30여년 뉴욕 생활의 편린을 ‘마음의 선’으로 그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 신관에서 열리고 있는 ‘이일과 선의 영속성’은 볼펜으로 동양적인 호흡과 명상의 아름다움을 좇아온 중견 화가의 회상이다. 낯선 이국 땅에서 폭풍처럼 휩쓸렸던 근심과 고뇌, 격정의 파노라마가 20여점의 선의 미학으로 영글었다.

이씨는 색색의 볼펜으로 빈 캔버스를 채우고, 빈 볼펜으로 가득 찬 캔버스를 긁어내면서 자신만의 우주를 표현해왔다. 1981년 브루클린미술관 전시에서 처음 볼펜 드로잉을 선보인 그는 캘리포니아 산호세미술관, 뉴욕 퀸즈미술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 초대되며 주목받았다.

이씨는 현대미술계에서 선의 영역을 확장시켰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작품은 미국 미술대학의 드로잉 교재에도 실려 있을 정도다. 그런 그가 미국 화단에서 볼펜회화로 인정받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발 옷 가발 조명 가게의 점원, 이삿짐센터 직원, 집수리 인부로 전전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미술작업을 했습니다. 2년 이상 난방시설이 없는 창고에서 버티기도 했고요.”

숱한 고난을 겪은 그는 1970년대 대학 시절 경험한 미니멀리즘과 단색 회화의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화풍에 저항하며 새로운 추상 회화를 시도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 서울에서는 판화가 유행했어요. 황규백 씨의 판화가 관심을 끌었죠. 한때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운영하는 판화연구소에서 공부했는데 송곳으로 에칭 작업을 하다가 그 손맛에 매료됐어요. 그 느낌을 페인팅에 적용할 수 없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볼펜을 잡기 시작한 겁니다.”

볼펜 선 하나하나를 무수히 겹쳐 완성하는 그의 작업에는 볼펜이 수도 없이 들어간다. 한 점을 완성하는 데 수백 자루의 볼펜이 닳아 없어진다. 5~6회의 캔버스 코팅작업도 필요하다. 통상 한 작품을 마무리하는 데 2~3개월이 걸린다.

이씨는 “처음 볼펜으로 그릴 때는 못으로 배경의 코팅을 긁어내는 작업도 함께 했지만 검은색 잉크의 일정한 선이 좋아서 볼펜을 고집하고 있다”며 “요즘은 초기 때가 생각이 나서 다 쓴 볼펜의 심으로 배경의 코팅을 벗겨내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시도한 작업에서 볼펜은 물감이 없는 붓처럼 연장으로만 남아 있어요. 볼펜 작업은 볼펜 색이 나오는 라인으로 면을 채우는 것인데 신작의 방식은 기존에 캔버스에 입혀진 인디고 블루를 빈 볼펜이나 대나무 스틱으로 긁어내는 것이니 거꾸로인 셈이죠. 이 작업을 하려면 흔한 유화물감이 아니라 뉴욕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오일로 해야 합니다.”

이씨의 작업은 은근히 혁신적이다. 미국의 유명화가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기법과 비슷하지만 서예, 풍경화, 섬유, 도예의 한국적 전통이 함축적으로 살아 숨쉬고 있어서다. 뉴욕 화단이 ‘동양적 감성과 현대적 터치감의 절묘한 조화’라는 평가를 하는 이유다.

그가 긋는 자유로운 선들은 마치 춤을 추는 듯 날카롭고 역동적이다. 이씨의 작품은 지난 3월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4점을 사들이며 시장에서도 인기를 더하고. 현재 1.6m 크기 작품은 6000만~1억원 선에 거래되고 있다. 전시는 내달 15일까지. (02)2287-35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