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S사의 김 과장은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고민한다. ‘오늘은 회사에 뭘 입고 가지.’ 옷 맵시도 나지 않는 체형에다 패션에 관심도 없는 그에게 비즈니스 캐주얼은 고역이다. 과거처럼 정장 차림이라면 와이셔츠와 넥타이만 바꿔주면 되겠건만, 아침마다 코디 걱정을 해야 하는 복장 문화가 오히려 짜증스럽다.

요즘에는 그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여름철 전력난으로 이른바 ‘쿨 비즈’가 대세가 되면서, 공무원까지 반바지와 샌들 차림으로 출근하는 판이 됐으니…. “오십을 넘긴 그룹장이 면 티셔츠와 면바지를 멋있게 맞춰 입는 것을 보면 솔직히 샘이 납니다. 그러잖아도 여직원들이 저를 보는 눈치가 ‘노땅’, ‘촌놈’ 보는 듯한데, 올 여름에는 더 신경 쓰이게 됐네요.”

◆“코디 고민 안 해도 되는 유니폼이 더 좋아”

S사 김 과장의 경우처럼 쿨비즈 복장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직장인들이 적지 않다. 건설업체 자재발주팀에서 근무하는 최 대리는 같은 팀의 정 부장을 가능하면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자신만 보면 옷차림을 지적하는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다.

서른 중반이 넘도록 여전히 솔로인 그에게 옷은 단 두 종류가 있을 뿐이다. ‘회사에서 입는 옷’과 ‘집에서 입는 옷’. 철마다 두 벌 정도의 셔츠를 갖고 ‘2교대’를 세우는 김 대리에게 복장 자율화는 ‘복장 터지는’ 소리일 뿐이다. 지난해처럼 정장일 때야 티가 안 났지만, 캐주얼 복장으로 바뀐 후에는 ‘단벌 신세’가 금방 드러난다. ‘옷차림도 자기관리’라며 복장에 신경을 많이 쓰는 정 부장의 눈에 최 대리가 곱게 비칠 리가 없다. “부장이 ‘맨날 똑같은 옷을 입냐’고 한 소리 할 때마다 ‘우리팀에 미혼 여직원도 없는데 잘 보일 데가 어디 있냐’고 대충 웃어 넘기죠. 그러나 잔소리 계속 듣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차라리 은행처럼 근무복을 단체로 맞췄으면 좋겠습니다.”

유통업체에 다니는 송 주임은 다른 이유로 여름철 패션이 신경 쓰이는 사람이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생각없이 새긴 팔뚝 문신 때문이다. 평소 반듯한 이미지와 성실한 업무자세로 좋은 인상을 심어온 그에겐 상당한 부담감이다.

정장 시절엔 여름에도 긴팔 와이셔츠를 입으면 오히려 ‘정통 패션’이라며 좋은 소리를 들었지만, 쿨비즈로 바뀐 후엔 긴팔만 고집하는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꽤나 의식이 된다. “쿨비즈를 권하는 회사는 쿨해서 좋지만 문신을 감춰야 하는 제 자신은 쿨하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영업맨, “쿨비즈는 ‘남의 일’”

직장 내 쿨비즈 바람에도 불구하고 영업사원들은 노타이는 꿈도 못 꾼다. 한 증권사 영업팀에 근무하는 유 과장은 여름철이 되면 ‘다른 부서로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이유는 복장 때문이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쿨비즈 복장을 권장하면서 사무실 내에선 넥타이를 벗고 편안한 복장으로 일하지만, 고객들을 만나러 갈 때는 반드시 정장 차림에 넥타이까지 매야 하는 것이 ‘드레스 코드’다.

고객을 방문하기 위해 서랍 속에 넣어둔 넥타이를 꺼내 목에 맬 때마다 ‘영업에 목 매는 자신’을 절감하게 된다는 게 유 과장의 푸념이다. “두꺼운 넥타이를 매고 조일 때마다 ‘조직’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기분입니다.”

쿨비즈 때문에 웃지 못할 해프닝도 벌어진다. 식품업체 A사는 최근 전 직원의 쿨비즈 문화를 도입했다. 올해 예순을 넘긴 이 회사 B 사장도 쿨비즈 도입 첫날 솔선수범 차원에서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으로 출근했다. 사건의 발단은 그날 안내 데스크의 보안 요원도 첫 출근날이었다는 것. 사장의 얼굴을 알 리 없는 그는 편한 차림새의 노신사로 보이는 사장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할아버지, 여기 들어오시면 안됩니다. 빨리 나가세요.” 순간 사장 옆 비서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고, 로비 여기저기에선 입을 가리고 ‘큭큭’ 거리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 보안 요원은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으며 별탈 없이 잘 근무하고 있다는 후문.

◆“여직원이 허리 숙이면 눈 돌려요”

대기업 L사에 근무하는 정모 상무는 최근 젊은 직원들의 옷차림을 볼 때마다 얼굴을 찌푸리곤 한다. L사는 올초 젊은 기업으로 탈바꿈하겠다는 목표로 직원들에게 자율 복장을 권장했다. 문제는 회사의 권고에 직원들이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지나치게 자율적인’ 복장을 입는다는 것이다. 특히 여름이 되면서 가슴이 훤히 파이고 허벅지가 드러나는 미니 스커트를 입은 여직원들이 많아졌다. “여직원들이 허리를 숙일 때마다 의식적으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괜히 뭐라고 했다가 성차별 발언한다고 찍힐까봐 아무 말도 못하죠.”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 대리는 얼마 전 큰 맘을 먹고 구두 대신 샌들을 신고 출근했다. 이달 들어 회사에서 파격적으로 남자 직원들에게도 샌들을 허용해 줬기 때문이다. 지난달부터 무더운 여름 날씨가 이어지자 발에 땀이 많은 남자 직원들의 건의를 회사 측에서 받아 들여줘서다. 그러나 문제는 김 대리가 샌들을 신고 간 날 퇴근길에 생겼다. 부장이 갑자기 그를 호출하더니, 거래처 사장이 초대한 저녁 모임에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댈 핑계가 없었던 김 대리는 결국 근처 백화점으로 부리나케 달려가 새 구두를 사야 했다. “쿨비즈라고 너무 편하게만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산 구두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회사에 놔두고 다닙니다.”

강경민/고경봉/김일규/강영연/정소람 기자 kkm1026@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