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드레스 코드
2007년 여름 국내 한 케이블TV가 ‘20대가 가장 사랑하는 스타’ 시상식을 열면서 관객에게 되도록 노출이 심한 옷을 입고 오라는 주문을 했다. 치마는 짧을수록 훈훈하다, 쇄골은 드러내라고 있는 것이다, 치마 밑 쫄바지 따위는 개나 줘라, 네가 더우면 남도 덥다 따위의 문구를 홈페이지에 올려 최대한의 노출을 유도했다. ‘보기만 해도 더운 의상은 죄악으로 간주해 맨 마지막에 입장하게 된다’는 조건까지 붙여 황당한 드레스 코드라는 비난을 받았다.

반대로 스위스 은행 UBS는 2010년 말 지나치게 엄격한 직원 복장 규정을 제시해 논란이 됐다. 남자는 검정·네이비·회색 정장에 검은 양말을 신어라, 염색을 해선 안 된다, 여자는 자신의 피부색과 비슷한 속옷을 입어야 한다, 몸에 달라붙는 속옷·블라우스는 피하라, 검은색 매니큐어를 칠하지 말라…. 44쪽에 달하는 드레스 코드집에는 심지어 향수는 아침에만 뿌려야 하고, 점심에 마늘·양파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말라는 것까지 포함됐다. 비판이 일자 UBS는 일부 규정을 완화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드레스 코드는 지위 종교 재산 등을 나타내는 사회적 징표다. 고대 로마에서는 원로원 의원들만 티레산 자주색 물감으로 염색한 옷을 입었고, 영국 튜더 왕조에서 모피는 고위 귀족, 벨벳은 기사의 아내에게만 허용됐다. 스코틀랜드에서 체크무늬 복장은 가문과 혈통을 나타낸다. 이슬람 여인들의 부르카는 엄격한 율법을 따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990년대 이후 티셔츠와 운동화 차림의 실리콘밸리 젊은이들이 미국경제의 총아로 떠오르자 창의적 사고에 도움이 된다며 자유 복장을 허용하는 기업이 부쩍 늘었다.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을 소개할 때마다 청바지와 검은색 터틀넥을 입어 주목을 받았다.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이달 초 런던에서 노타이 정장에 포켓치프를 꼽고 나와 갤럭시S3를 공개했다.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가 때아닌 드레스 코드 논란에 휩싸였다. 페이스북 상장을 앞두고 후드티에 청바지 차림으로 투자설명회에 참석하자 투자자를 무시하는 행동이란 비난이 일고 있다. IT업계에선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한 젊은 억만장자가 월가의 관행에 자신을 억지로 끼워맞출 필요가 있겠느냐는 옹호론이 나온다.

아무리 자유복장 시대라지만 옷 입는 규범은 있게 마련이다. 업무 성격과 효율을 고려한 복장을 갖추되, 분위기와 너무 동떨어지지 않는 게 좋다. 평균보다 약간 수준 높게 입는 것이 안전하다는 조언도 있다. 그나저나 투자자들 앞에 겁없이 등장한 저커버그의 칙칙한 후드티가 벤처의 상징인지 드레스 코드의 파괴인지 애매하긴 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