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보수 '파월 메모'로 총궐기…좌파 '反시장 캠페인' 뒤엎다
1981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장관들에게 ‘리더십 연구서’를 나눠주며 독파할 것을 지시했다. 1100쪽 분량으로 세제 개혁, 정부조직 간소화, 공무원들의 생산성 제고, 규제 개혁을 담은 연구 제안서였다. 학계는 이 제안서에 담긴 2000가지 사항 가운데 약 60%가 결실을 봤다고 평가하고 있다. 워싱턴 DC의 매사추세츠 애비뉴 동쪽 214번지에 위치한 헤리티지 재단. 8층 높이의 회색 대리석 건물로 화려하지도 않고 웅장하지도 않은 이곳에서 당시 미국 경제를 장기 호황으로 이끈 전략이 입안됐다. 레이건식 보수 자유주의의 정수인 ‘작은 정부, 큰 시장’의 모태는 바로 헤리티지재단이 1979~1980년에 작성한 이 제안서였다.

○미국 역사를 바꾼 ‘메모’

미국에서 보수와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대표하는 헤리티지 재단의 출범은 기업들과 보수세력에 대한 좌파 진영의 공격에서 비롯됐다. 1971년 미국의 좌파 진영은 엄청난 기세로 반기업·반자본주의 캠페인을 벌였다. 국민들이 베트남 전쟁 장기화에 염증을 내고 있는 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사회 지도층에 대한 적대감이 대학가를 휩쓸었고 기업들은 경영권을 공격받고 있는 와중에도 젊은층의 환심을 사기에 바빴다. 지금의 한국과 비슷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

반전의 모멘텀은 미국 버지니아주의 루이스 파월이라는 검사가 만들어냈다. 그는 미국 전역의 우익 인사들에게 ‘보수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파월 메모(Powell Memorandum)’를 보냈다. 이때 개인 자격으로 25만달러를 쾌척한 사람이 쿠어스맥주의 사주였던 조지프 쿠어스였다. 이를 신호탄으로 많은 독지가들이 성금을 내기 시작했고 오늘날 헤리티지 재단의 설립자금으로 꾸려졌다. 미국의 보수세력들은 이 재단을 기반으로 인적·물질적·지적 네트워크를 전국적으로 총동원해 좌파 세력에 맞섰고 사회의 흐름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

○1815 vs 35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 국회의사당과 500m 정도 떨어져 있다. 서울 여의도에 자리잡은 전국경제인연합회 산하 한국경제연구원도 국회에서 1㎞ 거리에 있다. 하지만 두 연구소의 위상과 역할은 천양지차다. 한경연만 탓할 것이 아니다. 공공·민간을 가릴 것 없이 제대로 조직과 역량을 갖추고 있는 싱크탱크는 전무한 실정이다.

미국과 한국의 결정적 차이는 연구 결과에 대한 ‘신뢰도’다. 헤리티지 재단을 비롯한 미국 싱크탱크의 연구보고서는 정부 관계자들이 주요 참고자료로 여겨지지만 국내 싱크탱크는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미 펜실베이니아대가 지난 1월 발표한 ‘2011 세계 싱크탱크 순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싱크탱크는 35곳으로 35위에 그쳤다. 미국은 1815곳으로 압도적 1위를 차지했다.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다. 국내 싱크탱크에 대한 낮은 신뢰도는 이들의 태생적 한계 탓이다. 대부분 국내 연구소는 정부나 모기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국책 연구기관은 대통령이나 집권 여당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각기 다른 연구 결과물을 내놓는다는 비판을 받는다. 삼성경제연구소, LG경제연구원, SK경제경영연구소 등 대기업 부설 연구소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모기업에 불리한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독립성과 양질의 인력 수급이 관건

전문가들은 보수 싱크탱크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한 기본적 요건으로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독립적인 조직 구조와 양질의 연구원을 꼽는다. 둘 다 쉽지 않은 조건들이다.

헤리티지 재단은 개인 소액 기부금이 연간 운영수익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기업 기부금 비율은 한 자릿수에 그친다. 기부금을 내는 개인들은 대부분 미국의 현 체제가 유지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산층들이다. 독립적인 운영을 생각한다면 국내에도 헤리티지 재단과 같은 개인 기부 모델을 도입해야 한다. 한 경제연구소 관계자는 “일단 복수의 대기업들로부터 십시일반식으로 기금을 마련한 뒤 일반 국민으로까지 기부 대상을 단계적으로 넓혀가는 방안이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해당 분야에 권위를 갖고 있는 전문가, 이른바 ‘빅 샷(big shot)’도 필요하다. 연구원 경력을 대학교수 등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자리 정도로 인식해서는 곤란하다는 얘기다. 전문성 있는 인력들이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는 것도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싱크탱크

think tank.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 전문가들이 국방 전략을 ‘구상(think)’하던 ‘안전한 공간(tank)’을 뜻하는 합성어에서 나온 말. 현재는 주요 정책 연구 기관을 일컫는 용도로 쓰인다. 주로 정책 결정자에게 정책대안을 제시하고 비교 평가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워싱턴=김홍열 특파원/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