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왕조 실핏줄은 하급관리…선비의 역할은?
역사는 승자의 몫이다. 왕이나 점령자의 기록 일색인 까닭이다. 실제 삶의 저변은 훨씬 넓고 깊다. 기록되지 않은, 언급됐더라도 미미한 사람들로 역사의 시공간은 채워진다. 조선시대 그런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조선의 9급 관원들》에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의 가장자리에서 나라의 공무를 맡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시선의 각도가 다르긴 하다.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맨얼굴을 올려다봤다.

[책마을] 조선왕조 실핏줄은 하급관리…선비의 역할은?
《조선의 9급 관원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한다. 조선왕조의 하급 관리들이다. 동사무소 직원, 경찰과 소방관, 각종 단속반 등 일상에서 수시로 만나는 우리 동네 공무원들과 비슷한 신분이다. 이름도 낯선 직책이 많다. 호랑이 사냥꾼 착호갑사(捉虎甲士), 시간을 알려주는 금루관(禁漏官), 관청의 심부름을 하던 소유(所由), 관리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구사(丘史) 등이다. 저자인 김인호 광운대 초빙교수는 “이들은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실핏줄과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이들을 언급한 기록은 많지 않다. “조선왕조실록과 문집 등에 오늘날 신문 사회면의 단신처럼 남은 흔적”뿐이다. 떨어진 곳은 잇고 희미한 부분에는 살을 붙여 그 시대 삶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엮어낸 저자의 솜씨가 일품이다.

숙종 때 호남지방 호환 사건에 등장하는 착호갑사가 눈에 띈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에는 호랑이가 많았던 것 같다. 실록에는 1392년(태조1)부터 1863년(철종14)까지 471년간 호랑이가 937회나 나타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피해를 입은 사람도 3989명이나 된다. 착호갑사는 이 호랑이를 잡는 전문 사냥꾼이요 직업 군인이었다. 호랑이 머리는 기우제에 사용됐고, 가죽은 공물이자 돈벌이기도 했다. 면포 30필이던 가죽 가격은 15세기에 80필로 뛰었고, 16세기 중엽에는 400필에 달했다.

오작인은 시체를 검시하는 일을 했던 사람이다. 두 번의 검시는 필수이고, 의심이 생기면 네 번까지 했다고 한다. 망나니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 보통 회자수, 사람을 끊는 기술자로 불렸다. 단칼에 목숨을 끊는 조건으로 사형수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게 가장 천시받았던 망나니들의 힘이었다.

저자는 “이들 하급 관리는 양반과 백성 사이에서 천시당하기도 했지만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고, 출세를 할 수 있는 기회였다”며 “지금의 공무원이나 전문직보다 어쩌면 더 인기 있는 직종이었다”고 말한다.

[책마을] 조선왕조 실핏줄은 하급관리…선비의 역할은?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는 ‘선비 청문회’격이다. 조선의 지식인이며 실세였던 선비들의 이미지를 검증한다. 치켜세우기 일색인 선비문화 평가의 균형잡기 시도로 읽으면 되겠다. 저자는 선비가 지배한 조선은 가난했고, 군사력도 약했으며 민심도 조정에 호의적이지 않았다며 기존에 형성된 선비의 역할과 이미지를 비판한다. 선비의 덕목인 지조와 의리에 대한 시선도 곱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저자는 “선비들의 의리를 잘 실천한 예로 의병 활동을 꼽는다”며 “그러나 그건 조선을 위한 게 아니라 명나라가 주도하는 중화질서, 중화문명을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선비들의 청빈과 안빈낙도 기질도 다른 시선으로 봐야 한다며 얼굴을 붉힌다. 조선이란 역사적 공간에 존재했던 선비는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었던 재력가가 아니었더냐는 것이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