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한국 민주주의 퇴행의 길로 들어섰다
이성에 기반한 질서정연한 민주주의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이 민주주의는 개별적인 이익을 넘어 국가의 보편적 이해를 다룰 수 있는 적절한 지적 수준을 유권자들에게 요구한다. 개인의 자유와 그것의 원천인 비밀선거를 통해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그런 민주주의다. 여기에 대립하는 민주주의는 대중민주주의다. 대중은 언제나 직접민주주의를 지향한다. 투표소에서의 공중 혹은 지식 대중이 아닌 길거리 대중이 주인공이며 이들이 원초적 권력자다.

대중은 권력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되고 때로는 거리를 점령하면서 스스로 권력자가 된 듯한 기분을 체험한다. 마오쩌둥의 문화혁명 같은 것이 이런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사례다. 인민위원회나 코뮨 제도 역시 그렇다. 인민의 이름 아래 3권 분립도 권력에 대한 통제나 절차도 무시하게 된다. 여기서는 대중의 권력의지가 핵심이다. 지금 박원순 시장의 협치라는 것에는 그들이 시인하건 않건 이런 독소가 함유되어 있다.

대중 민주주의의 절정은 문화혁명과 킬링필드다. 촛불주의자들이 이를 부정해보았자 본질은 다를 것이 없다. 독일인의 염원을 한몸에 안고 내달렸던 히틀러도 같은 범주다. 독일인들,특히 청년들은 열광하며 지도자와 일체가 되어갔다. 스탈린도 마찬가지였다. 나치즘이 독일식 근대화의 필연적 귀착점인지 아니면 일종의 일탈사례였는지에 대해서는 치열한 논쟁이 있어왔다. 민주주의가 민족주의,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적개심과 결합하면 열기로 후끈 달아오른다.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이미 대중화의 길로 들어선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외부 세계를 악으로 규정하는 광우병 파동이나 반FTA 책동도 그런 증후군의 하나다. 실의에 빠진 대중에게는 억눌린 민족의 비감한 신화가 필요하고 영광된 과거가 있어야 하고 민중의 삶을 일으켜 세울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 인민이 주권자가 되는 데는 인민의 정신을 온몸으로 체화한 지도자가 있어야 한다. 고(故)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대표적 인물이었다. 지도자는 모든 구악(舊惡)을 일거에 쓸어버리고 구체제를 전면 부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제도권 출신이 아닐수록 더 선호된다.

대중이라는 이름의 주권자들은 작은 독재자가 되어 광장을 지배하기를 원한다. 지금 그 광장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는 간판이 붙어있다. 그러나 문화혁명이나 히틀러의 광장과 본질은 다를 것이 없다. 대중은 강력한 무엇인가에 귀속하고 싶어한다. 인터넷과 SNS가 새로운 해방 공간이다. 가증스런 인신공격도 익명 속에서는 자유롭다. 필시 머지않아 인터넷 광장 아닌 길거리 광장으로 나올 것이다. 아니, 시청 광장은 벌써 해방구의 분위기를 풍긴다. 다양한 복지 정책들은 국가에 대한 대중의 청구서요 국가가 대중에게 살포하는 뇌물이다. 히틀러나 마오쩌둥에게 독일과 중국의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의 2040도 정치적 열광의 체험을 열망한다. 87년 체제는 그렇게 승화되기보다는 퇴행의 길로 들어섰다. 이 허망한 열정은 에릭 프롬이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라고 불렀던 자기파괴적 본능의 지배를 받는다. 이것이 근대화가 종종 실패하는 진짜 이유요 후진국이 결코 선진국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자기암시적 운명이다.

문제는 기존 정치질서에는 2040이 갖는 촛불의 열정을 순화시킬 지성도 에너지도 없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은 무능하고 부패해 있으며 귀족적 분위기마저 풍긴다. 스스로를 해체하는 것 외엔 출구가 없다. 그 누가 차기 권력자가 되건 지금의 정치환경에서라면 대중 독재의 전위로 될 가능성이 높다. 이명박 정부의 무능과 무정견이 그 길을 활짝 열어놓았다. 이것이 진정한 위험이다. 그나마의 근대화 성취물들이 검붉은 탁류에 모두 휩쓸려 갈 수도 있는 위기다. 언론과 정당은 2040에 뇌물을 던져 주기에 바쁘다. 좌익 전교조 20년은 이제 그 열매를 맺었다.

정규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