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화가인데 글재주가, 아니 이야기를 들려주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시원한 여백에 글 한바닥 그림 한바닥이 번갈아 계속되는 이 책 《그림선물》은 정말 선물 같은 책이다.

"어느새 타향살이 40년.그 긴 세월 동안 주로 영어만 쓰고 살아서 모국어인 한국말이 점점 어눌해지는 게 안타깝다"는 저자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역시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포인트는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저자는 화가이며 책의 주연은 그림이겠지만,그렇게 생각해버리기엔 달콤하고 쫄깃한 '글'에 미안해진다. "한국말의 그림은 '그리움'이란 뜻이고 '글'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는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의 말이 딱 들어맞는다. 그림과 글이 잘 버무려진 '이야기 비빔밥'이랄까.

책 속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신발을 닦으며 그 신발 속에 발을 넣어보는 소녀가 있고, 욕조에 몸을 담그고 물위로 나온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일상의 여유를 찾는 생활인이 있다.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에게 질투를 느끼고는 이내 그 감정을 애정으로 바꾸는 우리네 시어머니도 들어 있다.

화가라는 사람들에게서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던 걸까. "화가인 나는 사람들에게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이라고 말문을 뗀다. 내게 그렇게 자신없는 말을 하게 만든 도도한 현대미술계가 참 안타깝다. 벌거벗은 임금님이 따로 없다. 그림을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보려고들 한다"며 화가로서의 반성도 곁들인다. 매일 조금씩만 오래오래 보고 싶은 책이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