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보증보험이 생계형 서민 채무자 19만명의 빚을 탕감하겠다고 엊그제 발표했다. 연체기간이 10년 이상인 채무자들에 대해 연체이자를 완전히 면제해주고 대출 원금의 최대 50%까지 감면해준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취임한 김병기 사장이 정부의 친서민 모드에 화답하기 위해 내놓은 야심작인 셈이다.

그렇지만 이런 선심정책은 납득하기 어렵다. 서울보증보험 자체가 엄청난 빚더미에 앉아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서울보증보험은 외환위기 직후 2001년 말까지 무려 12조원 규모의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 그동안 3조7000억원가량을 갚았다지만 그림에서 보듯 아직도 남은 빚이 8조원을 넘는다. 이런 '불량 채무자' 신세인 서울보증보험이 이자까지 합해 1조원에 육박하는 생계형 채무자들의 빚을 탕감하겠다고 생색을 내고 있으니 앞뒤가 바뀐 행태가 아닐 수 없다. 신임 사장이 회사 사정은 감안하지도 않고 마치 개인돈 쓰듯이 멋대로 선심을 쓰겠다는 발상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서울보증보험 측은 "탕감해주는 채무가 어차피 받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것으로 빚을 받으려면 오히려 돈이 더 든다"는 입장인 모양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못받을 채무를 대손처리하면서 신임 사장이 서민 부담을 덜어주겠다고 생색을 내려는 얘기밖에 안된다. 정말 어처구니없다.

연체기간이 오래된 사람을 탕감 대상으로 정한 것도 말이 안된다. 빚을 성실하게 갚은 사람을 제쳐 놓고 10년 이상 안갚고 버틴 사람부터 혜택을 주겠다는 것이니 참으로 앞뒤가 바뀐 논리요, 금융질서를 부정하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경제관료 출신인 김 사장이 앞장서서 모럴해저드를 부추기는 꼴이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성실하게 빚을 갚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김 사장은 서울보증보험이 남은 공적자금을 차질없이 갚기 위해 보증보험시장 개방은 당분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서민 지원을 핑계로 사실상 독점적 지위를 유지시켜 달라는 발상도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