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이야기》 시리즈의 번역 출간은 한국 출판계의 '전설'이고 꿈이었다. 지은이 듀런트는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저술가. 철학박사인 그가 정리한 '철학이야기'는 재미와 깊이를 함께 갖춰 1970년대부터 대학생 필독서 목록의 단골이었다. 그런 그의 대표작이 실은 《문명이야기》란 사실은 일찌감치 알려졌다. 하지만 1권이 미국에서 나온 지 70년이 넘도록 번역판이 나오지 못했다. 방대한 분량 때문에 출판사들이 엄두를 내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 책을 보니 '과연' 하는 생각이 든다. 우선 소설보다 재미있다. 시리즈의 제목이 문명의 역사(history)가 아니라 이야기(story)임에 주목하자.예를 들면 르네상스 편을 보자.14세기 말 추기경회의에서 로마 사람을 뽑으라는 군중의 압력에 굴복해 택한 교황 우르바누스 6세는 위로부터의 개혁을 밀어붙였다. 추기경 등의 도덕성을 공격하고 모든 사례금과 선물도 금지시켰다. 이탈리아 추기경을 많이 임명하기 위한 속셈도 있었다. 이에 반발한 프랑스 추기경들이 우르바누스 선출은 로마 폭도들의 위협에 따른 것이라며 무효를 선언하고 클레멘스 7세를 옹립했다. 이렇게 바티칸과 아비뇽에 두 명의 교황이 섰다가 다시 단일화되기까지 상호 비방과 음모,반란이 판친 이야기는 그것만으로 한 편의 드라마다.

단순히 흥미로운 일화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비전공자가 썼음에도 역사가로서의 혜안이 곳곳에서 번득인다. 대표적인 것이 서양문명의 뿌리로 동양을 주목한 부분이다. 시리즈 첫 권인 동양문명 편 '마치는 글'에서 문명의 요소로 노동 · 가족 · 법 · 도덕 · 종교 · 과학 · 철학 · 예술 등을 들면서 물레와 바퀴,비단과 인쇄술,대법전과 인구조사 등이 이집트와 중국 등에서 서양에 전래된 사실을 적시한다.

진시황을 '중국의 비스마르크'라 하거나 로마제국이 망한 것은 만리장성에 막힌 훈족이 유럽으로 몰려간 때문이라 한 점도 출간 당시엔 탁견이었다.

무엇보다 일본과 미국의 대결을 예측한 부분은 역사가로서의 듀란트를 다시 보게 한다. 그는 '동양문명 편'에서 일본을 다룬 글 말미에 "두 국가가 하나의 시장을 놓고 다투다 경제발전에 패한 국가가 자원과 군사력에서 우세하면 상대에게 전쟁을 거는 것이 역사의 상례였다"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예견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어지간한 잠언집을 무색하게 하는 통찰력이 시리즈 마지막 권 출간 이후 30년이 넘도록 책의 생명력을 유지해 준다. '돈이 죄악의 비용을 감당해 주면 죄는 더욱 널리 퍼지게 된다''위대한 인물에는 씨가 없다' 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하게 만드는 예다. 은근한 유머도 느껴진다. "엄격한 도덕적 형벌 체계,적절한 가난과 힘든 일,또 마누라의 끊임없는 감시만이 남자를 일부일처제로 안내할 수 있다"(르네상스 시대 성도덕 타락을 언급하며)는 문장을 대하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한계도 있다. 무엇보다 묵은 책이다. 근본적으로 서양,그중에서도 서부 유럽 중심이다. 일본에 경도됐다는 혐의도 짙다. 중국 정벌에 나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독한 한 조선 장수'(이순신 장군)에 의해 좌절됐다는 식이다. 그래도 책은 흥미롭고 가치 있다. 개인의 세계사 통사로 이만한 게 또 나올까 싶을 정도다.

김성희 < 북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