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미국은 '맥아더 勝戰'에도 분단을 택했다
"우리는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으니까요. 제가 지금껏 함께 지내온,혹은 역사를 통해 봐온 모든 군 지휘관들은 이기기 시작한 전쟁을 이길 수 없게 만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과는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누가 그랬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합참이 아니라 국무부가 맥아더 장군의 행동을 구속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게 제 의견이며,아직도 저는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

6 · 25 당시 미 극동공군 사령관이었던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이 휴전 후 1955년 미국 상원 법사위 국내안보소위 청문회에 출석해 이 같은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맥아더가 승기를 잡았지만 미국 정치권과 국무부의 제지로 휴전협정을 맺고 한반도를 분단시켰다는 의미였다.

[책마을] 미국은 '맥아더 勝戰'에도 분단을 택했다
《한국전쟁 일기》는 당시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이 쓴 일기와 함께 극동군 사령관이자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각 군 수뇌부 주요 인사들과 주고받은 비밀 전문과 사적인 전문들을 공개한 전쟁기록서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차원을 보여주는,흥미로운 사료다.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의 일기에는 맥아더 장군을 위시한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이 세운 작전의 문제점,성공과 실패 사례들이 담겨 있다. 전쟁 동안 미군의 막후 활동과 언론 홍보 활동도 상세히 기록돼 있다. 무엇보다 한국전쟁 동안 미 육 · 해 · 공군이 불협화음 속에서 합동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로 조율해나가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 군이 3군 합동 전력을 키우는 데도 중요한 지침서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한국전쟁의 성격이 2차대전과 완전히 달랐음을 보여준다. 2차대전은 오로지 승리를 목표로 최상의 전략을 세워 수행했던 전면전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정치 · 외교적인 문제를 민감하게 고려해야 하는 '제한전'이었다.

2차대전 후 국방 예산이 대폭 축소된 미군은 물자를 충분히 공급받지 못해 자주 한계 상황에 직면했다. 미 정치권은 한국보다 소련의 위협 아래 있는 유럽 안보를 중시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공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소련군의 침략 가능성 때문에 고민할 정도였다.

그러나 38선을 넘어 북진해도 소련이 개입하지 않자 미국 본토에서는 승전의 샴페인을 터뜨렸다. 압록강 유역까지 유엔군이 진격하면 위협을 느낀 중공군이 침공할 것이란 정보는 무시했다. 한마디로 미군은 복잡한 이해관계와 상충된 정보를 조정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민감한 문제들을 서투르게 다루는 바람에 한반도는 결국 통일되지 못했다.

한국전쟁은 지상전만으로 치러진 게 아니란 사실도 알려준다. 미 공군이 1947년 미 육군으로부터 독립해 육군 및 해군과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의 독립된 군으로서 전투에 참가한 첫 번째 전쟁이었다. 미 공군은 제공권을 장악함으로써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을 막아냈다. 72만회나 출격해 1466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지상군에 가려졌던 공군의 활약과 가치를 일깨워준다.

스트레이트마이어 장군은 한국에서 세 가지 전쟁을 치렀다. 첫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싸움이고 둘째는 언론과의 전쟁이며 셋째는 미 육군 및 해군과의 전쟁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심근경색으로 군 생활을 일찍 마감해야 했다.

그는 공군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다. 언론이 해군과 공군의 항공전쟁에 대해 사실과 다르게 기술하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또한 공군의 근접 항공 지원 역할에 대한 미 육군과 해군이 오해했던 일,육군이 극동공군 사령부를 장악하고 자신의 예하에 두려 했던 시도,맥아더가 스트레이트마이어에게 모든 항공 부대에 대한 조정 통제권을 부여했음에도 해군이 자신만의 항공전쟁을 시도한 일화 등도 적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