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후유증에 시달리던 1999년 말.몸담고 있던 직장(대우자동차)의 워크아웃 결정과 인력구조조정으로 그는 하루아침에 '백수'신세가 됐다. 저절로 눈이 떠지는 새벽,이제 40대 초반의 나이에 출근할 곳이 없다는 갑작스런 현실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래서 같은 처지가 된 직장동료 10명과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조그만 사무실을 얻었다. 집에서 '눈칫밥'을 먹느니 함께 모여서 시간이나 때울 생각이었다. 놀기도 지겨울 때쯤 그의 귀를 잡아끄는 '키워드'가 누군가의 입에서 무심코 튀어나왔다. "요즘 바이오가 뜬다더라."

증시에서 바이오시밀러 대장주로 통하는 셀트리온의 서정진 회장의 10여년 전 이야기다. 서 회장은 전 직장 동료 10명과 함께 시장조사에 나섰다. 각종 보고서를 닥치는 대로 읽고,바이오 · 제약기업들을 탐구하다 보니 무한한 시장잠재력을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자동차 세일즈맨으로 한계가 있었다. 서 회장이 이때 해외 순례를 통해 돌파구를 모색했다. 미국을 시작으로 1년 동안 탐방한 국가만 40여개 나라.수백 명의 바이오 전문가 및 바이오 기업 관계자를 무작정 찾아다니며 확신이 생길 때까지 귀동냥을 했다. 국내 최초 바이오 기업의 성공신화는 이렇게 시작됐다. 셀트리온은 지난해 1800억원 매출에 1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의 '낙점'을 받다

충북 청주에서 나고 자란 서 회장은 가난한 집안의 2남2녀 중 장남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바로 하지 못할 형편이었지만 서울로 유학을 강행한 것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려는 소박한 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 때문이었다. 건국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후 1983년 삼성전기에 입사했다. 당시 손병두 제일제당 이사(현 KBS 이사장)의 눈에 들면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손 이사가 1985년 한국생산성본부로 자리를 옮기면서 단 한 명 데리고 간 이가 바로 서 회장이었다. 서 회장은 당시 '샐러리맨 서정진'에 대해 특유의 성실함에 현상을 파악한 후 요점을 정리하는 능력이 '남보다 조금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생산성본부 근무 시절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과 인연을 맺는 기회를 갖게 된다. 대우그룹 컨설팅을 해 주던 그를 눈여겨보던 김 회장이 1992년 초 "그냥 우리 회사로 들어오라"고 불렀고,그는 두말없이 김 회장의 말을 따랐다. 김 회장은 당시 34살이던 서 회장에게 대우자동차 경영혁신팀을 책임지는 임원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외환위기 탓에 '고속 승진 열차'를 탄 것 같았던 샐러리맨 생활은 7년만에 허무하게 끝났다.

◆"바이오를 확신하지 않은 적이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셀트리온은 온갖 루머에 시달렸다. 서 회장을 비롯한 창업멤버 대부분이 바이오와 아무 상관이 없는 전직 자동차 회사 샐러리맨 출신이어서 더욱 그랬다. 1년 전 싱가포르 펀드가 2000억여원을 출자하면서 이 같은 의문은 상당히 해소됐다. 하지만 '속빈 강정'투성이인 국내 바이오 기업의 현실을 감안할 때 시장의 의혹과 편견을 걷어 내는 일은 셀트리온의 지상과제이기도 하다.

최근 삼성의 바이오 진출을 계기로 셀트리온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무엇보다 원천기술을 보유한 외국 바이오 회사와 기술제휴-인천 송도 공장 설립-바이오시밀러로 초기시장 진입 등 삼성의 시나리오가 10년 전 셀트리온의 것과 판박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이오 문외한 10여명이 10년 후 글로벌기업 삼성과 똑같이 '바이오퍼즐'을 맞출 수 있었을까. 서 회장은 절박함과 확신의 차이를 비결로 꼽았다. "나에게 당시 창업은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는 말로 당시의 절박함을 표현했다. 햄버거 하나로 끼니를 때우면서 40여개 국가를 헤집고 다닌 것이나,일면식도 없는 외국 바이오 전문가들을 무턱대고 찾아 다닌 것도 '절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페이퍼(보고서)에 없는 것은 필드(현장)에 있다'는 것은 그의 변하지 않는 지론이다.

이 같은 확신의 차이가 수많은 경쟁자를 제치고 2002년 서 회장이 제넨텍에서 분리한 에이즈백신치료 전문바이오벤처 벡스젠과 기술제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후 에이즈백신의 임상 실패 등으로 수 차례 벼랑끝으로 내몰렸지만,당시 벡스젠에서 이전받은 기술과 과감한 시설투자는 현재 셀트리온 경쟁력의 원천이 됐다.

◆부드러운 카리스마

1m82㎝의 키와 100㎏ 남짓의 육중한 체구,까무잡잡한 피부의 서 회장을 처음 보면 위압감이 느껴진다. 인상처럼 사업 스타일도 저돌적일 것 같지만,의외로 섬세하고 장고(長考)하는 스타일이라는 게 주위의 평가다. 서 회장도 사업 초기에는 '독불장군'식 경영자였다. 사업 아이템을 정하고,기술이전을 해 줄 파트너를 찾아 협상에 성공하기까지 사실상 셀트리온을 세팅한 것은 서 회장의 '원맨쇼'에 가까웠다. 그도 처음에는 혼자서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주위 사람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고 서 회장은 말했다.

"똑똑한 사람은 시작할 수는 있지만 마무리하지는 못한다. 결국 마무리는 주위에 무수한 아군을 거느린 사람의 몫"이란 게 그가 체득한 교훈이다. 한때 입에 달고 살았던 "나만 따라와"란 말도 어느 순간 "고맙다"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의 주위에는 유난히 사람이 많다. 그가 '동지'로 칭하는 창업멤버 10명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들 10여명은 사돈의 팔촌의 '쌈짓돈'까지 끌어모아 초기 자본금 600억원의 21%인 130억원을 마련했다. 투자자들이 하나둘씩 떠나도 곁을 지켰다. 주변 사람들은 서 회장의 최고 미덕으로 신의를 꼽는다. 그는 회사가 지독한 돈가뭄에 시달릴 때를 포함해 창업 후 한 번도 직원을 내친 적이 없다고 한다.

◆긍정적 사고는 '나의 힘'

서 회장은 특별한 취미가 없다. 5년 전 사업 때문에 골프에 입문했지만 별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골프 타수도 90대 후반에서 100을 넘나드는 하이핸디캐퍼이다. 어떻게 취미가 없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직장생활을 할 때는 남보다 성공하기 위해,사업에 뛰어들어서는 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살다 보니 취미생활을 할 여유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회사가 어느 정도 정상 궤도에 올랐지만 서 회장은 지금도 특별히 즐기는 게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본 기억이 없다. 어느 순간 할 수밖에 없는 것을 하면서 사는 게 내 '팔자'라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더라."그는 1년의 절반 정도는 해외 출장을 간다.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냥 고된 일정이다. 하지만 그는 출장을 즐긴다. "짬짬이 이동거리가 많은 출장을 통해 부족한 운동을 보충하고,출장을 여행으로 바꿔 생각하니 어느 순간 즐거움이 느껴지더라."그의 '출장 예찬론'이다.

손성태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