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이 넘실대는 전남 보성

보성 쪽에서 낀 안개가 회천 쪽으로 넘어올 때 봇물처럼 몰려온다 해서 봇재라 불렀다던가. 봇재(230m) 고갯마루에 서자 산기슭을 빼곡히 채운 차밭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둘둘 만 녹색 조각보를 끝없이 이어붙인 듯한 차밭 사이로 옅은 안개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다.

이곳은 처음 차밭을 조성했던 일본사람들이 일제 패망으로 떠나간 후 한동안 버려져 있던 땅이었다. 그러다가 1957년 대한다업관광농원이 일본 개량 차나무 종자인 '야부기다'를 심었다. 현재 활성산 일대에는 우리나라 최대의 차밭이 조성돼 있다. 문덕면 대원사나 벌교 징광사지 주변에도 우리나라 고유의 야생 차나무가 자라는 걸 보면 보성이 하루아침에 차의 고장이 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차밭을 바라보노라니,내게 처음 차 맛을 알려준 선암사 괴각승 남명 스님이 생각난다. 그에게서 다선일미(茶禪一味) 아닌 다주일미(茶酒一味)를 배웠다.


웅건하면서 탈속한 느낌을 주는 보성소리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영천저수지 아래가 보성소리의 명인 정응민(1896~1964년)이 살았던 도강마을이다. 그에게 소리를 배우려고 봇재를 넘어다녔을 예전의 소리꾼처럼 봇재다원 옆으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내려간다. 난 일찍이 일본 요나누키 음계의 피가 섞인 '뽕짝'의 적자(嫡子)였으나 여차저차하여 판소리 애호가가 됐다. 여행 목록의 우선순위에 올라 있던 정응민 생가를 찾아가는 마음이 각별하다.

생가 담장 위에선 하늘타리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자 높은 석축 위에 앉은 '송계초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초당 옆에는 소리할 때 장단을 맞췄다는 북바위가 있다. 여기서 소리를 했다면 가까운 앞산에 부딪혀 곧장 메아리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적당한 울림을 가진 곳은 그 자체만으로 훌륭한 음악당이다. 마당에는 소리북 형태의 예적비가 있다.

백부 정재근에게서 박유전의 강산제 소리를 배운 정응민은 10대에 서울로 올라가 협률사에서 창극공연을 하기도 했지만 곧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보성소리'를 만들었다. 현재 그의 소리는 단가 '녹음방초'(4분31초),수궁가 '용왕 탄식~약성가' (8분21초)가 릴 테입에 담겨 전해질 뿐이다. 이곳에서 송계와 3~4년을 기거했던 명고수 김명환(1911~1989년)은 "응민씨는 무대 위에서 칭송받고 재창 받을 소리는 못 되았소.젊어서도 목이 안 좋았는갑디다. 허지만 명인이지라우.소리는 옛날식 그대로 고판으로 했어요.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101쪽)라고 증언한다.

아들인 정권진의 소리를 들어보면 정응민 바디는 사설이 우이하고 웅건하며 탈속한 느낌이다. 송계에게서 소리를 배운 정광수,성우향,성창순,조상현 등은 1970년대 이후 판소리계의 중추가 됐다.

선생이 소리를 연마했다는 흑운계곡 득음정을 찾아나선다. 계곡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자 기둥 사이에 당초각무늬 낙양각을 한 득음정이 나그네를 맞는다. 정자 위에선 폭포가 거침없이 물을 쏟아내리고 있다. 득음을 꿈꾸던 예전 소리꾼들은 저 폭포 소리를 이기려고 얼마나 피나는 독공을 거듭했을 것인가? 영화 '서편제'에서 동호에게 "지 소리에 지가 미쳐가지고 득음을 하면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속판이여"라고 소리 지르던 유봉의 목소리가 폭포 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듯하다.


한이 맺혀 처절한,그러나 감칠맛 나는 강산제

서편제의 비조 박유전(1835~1906년)의 자취를 찾아 강산마을로 가는 길에 잠시 군학리 해수욕장에 들른다. 사람의 그림자 없는 한적한 풍경 속에서 이웃 간의 경계가 없는 모래들의 삶만이 뜨겁다. 애써 찾은 강산마을에는 '강산제 판소리 예적비'만 외로웠다.

박유전은 18세 때 부친을 따라 순창에서 이곳으로 이사왔다. 정자에 앉아 있던 한설희 할머니(81)에게 "박유전의 자취가 이것밖에 없나요?"라고 물었더니 바로 앞 대숲을 가리킨다. 거기 박유전이 소리하던 바위가 있다는 것이다. 바위 옆 팻말에 그가 죽은 후 사흘 동안 "내 소리 받아가라" 는 혼백의 외침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전주대사습을 통해 중앙무대에 알려진 박유전은 흥선대원군에게서 '제일강산'이란 평을 얻고 벼슬까지 받는다.

정노식이 쓴 《조선창극사》는 '서편제의 분류가 박씨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목청이 절등하게 고와서 당시 비주가 없었다'고 평한다. 트로트 · 힙합 · 랩 등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는 판소리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마을을 떠난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술지 이수(述志 二首 · 나의 하소연)'라는 시에서 이렇게 한탄했다. '고개 들어 온 누리 쳐다보아도/ 보이는 것 없어라 정신만 흐릴 뿐/ 남의 것 본뜨기에만 정신 없으니/ 막상 흠은 꼼꼼히 따지지 못하네.'


쫄깃한 맛으로 이름난 벌교 꼬막

광주 이씨 씨족마을인 옥암리 예동마을에 들러 옛 양반가옥들을 둘러본 후 벌교읍 채동선 선생(1901~1953년) 기념비를 찾는다. 채동선은 정지용의 시 '향수'에 맨 처음 곡을 붙인 민족적 성향이 강한 작곡가였다. 벌교역 앞 벌교 시장은 읍 단위 시장치고는 제법 활기차다. 한 아주머니가 열심히 '가죽신 바닥'처럼 생긴 서대회를 썰고 있다. '서대가 엎드려 있는 개펄도 맛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서대회는 맛있다. 서대회는 6~10월이 제철이다.

보성의 3대 아이콘은 차밭 · 보성소리 · 꼬막이다. 정약전의 《자산어보》는 '꼬막은 크기가 밤만 하고 껍질은 조개와 비슷해 둥글다. 보성이 한때 패주자사(貝州刺史)라 불렸던 것을 보면 옛부터 조개들로 넘쳐나던 곳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아주머니에게 왜 꼬막이 안 보이느냐고 물었더니 요즘 불볕더위라 뻘이 뜨거워 살을 델 정도라서 못 잡는다고 한다. 또 여름엔 꼬막 알이 차서 미끄러워 한여름은 피하는 게 좋다고도 일러준다. '친절한 금자씨'가 본래 벌교사람이었던가?

안병기 < 여행작가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 회덕분기점(호남고속도로)→ 동광주IC→ 광주제2순환도로→ 화순→ 29번 국도 →보성

맛집

보성을 대표하는 꼬막은 참꼬막,피꼬막,새꼬막으로 나눈다. 참꼬막은 기와지붕처럼 팬 골이 20개,새꼬막은 30개며 피꼬막은 씨알이 아주 굵다. 피꼬막이나 새꼬막은 물속에서만 살지만 참꼬막은 하루 한 번은 햇볕을 봐야만 산다.

그래서인지 껍질이 두껍고 뭍으로 나와서도 15일 가까이 살아 있을 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벌교 지역에서 채취되는 참꼬막은 맛이 별나게 쫄깃쫄깃하다. 달이 꽉 찬 보름보다 달이 완전히 기운 그믐 무렵에 살이 많이 오르고 맛이 좋다고 한다. 보성읍 보성경찰서 옆 도성식당(852-3196).꼬막정식은 1인 기준 1만2000원이며,굴비정식은 2만원이다.

맛깔스러운 음식을 앞에 두고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라는 이문재의 시 '농담'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아무도 선뜻 생각나지 않을 때 나는 강한 사람도 외로운 사람도 아닌 진짜 민망한 사람이 된다.

여행 팁

보성읍에서 국도 18호선을 타고 5~6분가량 달리면 보성미력옹기 체험장이 있는 미력면 도개리에 닿는다.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전수자인 이학수씨가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전통미와 전통기법을 오롯이 지켜온 미력옹기 제작 과정을 관람할 수 있다. 체험비용은 1인 1만원,단체(50명 이상) 1인 8000원.예약문의 (061)853-8804,852-42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