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인가 대영박물관을 뻔질나게 드나든 적이 있다. 그때 전공과 관련한 자료 조사차 두 달 정도 런던대 도서관으로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는데 매일 오후 서너시쯤 도서관 문을 나서 길 건너편에 있는 이 세계 유수의 박물관을 들락거렸다.

그 중 제18전시실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곳 중 하나다. 아테네 파르테논신전의 페디먼트(지붕 아래의 박공 부분)와 프리즈(기둥 위의 부조를 새긴 부분)에서 뜯어낸 대리석 조각이 진열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이 전시실에 들를 때마다 나는 2세기 전 한 탐욕스러운 문명 파괴자의 만행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일명 '엘긴의 대리석'(Elgin Marbles)으로 불리는 이 조각 컬렉션은 영국 외교관이자 광적인 고대 예술품 수집가인 엘긴 백작(토머스 브루스,1766~1841)이 오스만제국 대사를 지낼 때 영국 예술가들에게 학습용 교재를 제공할 목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예술품 수집에 나선 데서 비롯됐다.

그는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오스만 황제의 허가장을 얻어 12년에 걸쳐 아크로폴리스의 유물을 조사하고 조각품들의 주형(복제를 위한 거푸집)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작업이 진행되면서 엘긴의 비서였던 필립 헌트는 주형을 뜨는 데 만족하지 않고 파르테논신전과 에렉테움신전의 명품들을 해체해 영국으로 가져가기로 마음을 바꾼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엘긴 백작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엘긴 일행은 해체 과정에서 조각들을 그냥 통째로 떼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것들을 작은 조각으로 절단해 떼어내기로 결정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문화재 파괴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이들의 가공할 해체작업은 즉각 영국에 알려져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조야를 들끓게 했다.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이런 야만적 행위를 주도한 엘긴 백작을 문명파괴자로 규정하고 자신의 명시 '해럴드 공자의 순례'를 통해 맹비난했다. 존 뉴포트 경도 엘긴 백작의 행위를 극악무도한 약탈로 규정하고 영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 이런 일을 벌인 데 대해 수치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바이런과 같은 낭만주의 시인인 존 키츠는 대리석 작품들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시를 써서 엘긴의 입장을 옹호했다. 하원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회는 결국 엘긴 백작에게 면죄부를 선사했다. 이에 따라 1816년 영국 의회는 엘긴 백작의 대리석 유물들을 국고로 3만5000파운드에 구입하기로 결정했고 이것들은 곧바로 대영박물관에 보내졌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 아크로폴리스의 대리석들은 에게해의 눈부신 햇빛과 작별을 고하고 런던의 어두컴컴하고 낯선 지붕 아래 둥지를 틀게 됐다.

'엘긴의 대리석'에 대한 논란은 결코 잦아드는 법이 없었다. 그리스로 반환하거나 영국에서 보관해야 한다는 상반된 입장을 놓고 학자들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게다가 국내외의 반환 압력까지 더해져 영국 정부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반환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파르테논신전을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언덕에 유기적인 통일체로 복원해서 방문자들에게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스웨덴 소장품,독일 하이델베르크대 및 미국 LA 게티박물관 소장품도 반환됐고 엘긴 백작이 오스만 황제의 허가장 규정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불법적으로 취득한 유물인 만큼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론도 만만치 않다. 영국의 일부 정치인,학자 및 국립박물관 측은 파르테논의 조각상들은 그리스인들만의 문화유산이 아니라 온 인류가 공유하는 글로벌 문화유산이며 이렇게 값진 유물은 유럽의 중심 도시인 런던에 전시되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대리석 유물들은 엘긴 백작이 합법적으로 취득한 것이며 공소시효도 이미 지나 그리스의 반환 요청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대영박물관 소장품 중 반환 논란에 휘말린 것은 비단 제18전시실의 유물만이 아니다. 따라서 파르테논 유물을 반환할 경우 유사한 반환 요구가 잇따를 것은 불을 보듯 뻔하며 박물관은 존폐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으므로 반환 요구가 쉽사리 수용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대영박물관을 찾는 수많은 내방객은 이런 착잡한 사정도 모른 채 이 거대한 인류문화유산의 보고를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할 뿐이다. 방문객들은 그 중에서도 그리스 문명의 정수인 파르테논신전의 유물을 보러 저마다 18호실로 달려간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문명파괴자 엘긴 백작이 기여한 바도 분명히 있는 셈이다.

18호실의 유물은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세 신전에서 온 것이다. 이 중 눈길을 끄는 것은 파르테논신전의 박공에 안치된 조각들과 신전 상단부를 빙 두른 부조 석판들이다. 특히 술에 거나하게 취한 주신(酒神) 디오니소스가 두 다리를 벌린 채 표범가죽 위에 비스듬히 기댄 박공의 조각에는 인간미가 가득하다. 에렉테움신전을 떠받치고 있던 여신상이 새겨진 기둥도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이오니아풍의 튜닉을 걸친 여신의 우아한 자태는 보는 이들을 고대 그리스신화의 낭만적인 세계로 안내한다.

영미 합작의 국제시장여론조사기관인 모리(MORI)는 1998년 '엘긴 대리석'의 반환과 관련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전체의 40%가 반환에 찬성했다. 반대 여론은 15%에 불과했다. 18%는 무응답,27%는 모르겠다고 답했다. 2002년의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흥미로운 점은 영구 반환이 아닌 장기 임대 형식의 반환에는 56%가 찬성했고 반대 의견은 7%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영국 국민의 상당수는 유물이 반환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제쯤 대영박물관의 디오니소스가 아크로폴리스 언덕의 뜨거운 태양 아래 유연한 자태를 뽐내는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디오니소스는 과연 자신의 고향에서 축배를 들 수 있을 것인가.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


건륭제의 여름궁전 파괴, 그 뒤에 있던 사람은…

중국 청왕조의 전성기를 일군 건륭제는 여름궁전인 원명원(圓明園)에 주로 거주했다. 그는 1746년 예수회 선교사로 청조의 궁정화가로 활동하고 있던 카스틸리오네와 장 드니 아티레에게 명해 원명원 동북쪽의 장춘원에 베르사유궁전을 모방한 서양식 건물을 짓도록 명했다. 이때 지어진 건축물들과 분수의 아름다움은 현재 남아 있는 동판화를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건축물들은 1860년 톈진조약의 불이행에 불만을 품은 영·프랑스연합군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고 만다.

1995년 봄 원명원을 방문했을 때 그 끔찍한 파괴의 현장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로코코풍의 조개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대리석 파편을 들고 얼마나 탄식했던가. 가공할 파괴의 주역이 누구인가를 알게 된 것은 한참 지난 후였다. 그는 북아메리카 총독을 지낸 제임스 브루스,바로 엘긴 백작의 맏아들이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대를 이은 야만적 문화재 파괴였다. 결국 피는 못 속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