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16일 경기도 광명의 돔 경륜장인 스피돔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특선급(프로 경륜선수의 3개 등급 중 최고 등급) 선수들이 대거 출전해 진검승부를 펼쳤기 때문이다.

선수들이 충분한 속도를 낼 때까지 선두를 이끌던 경기 운영요원이 전체 6바퀴 중 한 바퀴 반을 앞두고 퇴장하자 본격적인 승부가 시작됐다. 지름 333.33m,최대 경사각 45도에 이르는 벨로드롬에서 선수들은 온몸으로 페달에 힘을 실었다. 시속 70㎞를 넘나드는 승부에서 맨 먼저 치고 나온 사람은 지난해 말 데뷔한 경륜계의 신성(新星) 이욱동 선수(26).한 바퀴를 남기고 선두에 나선 이 선수는 폭발적인 스피드로 끝까지 선두를 지켜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경기에 출전하기 시작했지만 경륜 팬치고 상금랭킹 11위인 이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젊은 나이에 탤런트 윤상현을 연상시키는 서글서글한 눈매,오똑한 콧날이 인상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기의 비결은 무엇보다 '한 바퀴 선행승부'가 가능한 몇 안 되는 선수 중 하나여서다.

선행승부란 선두 요원을 따라 네 바퀴 반을 돌며 자리를 잡다 선두 요원이 빠져나가는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달려나가 끝까지 선두를 유지하는 전략이다.

▼선행승부를 고집하는 이유는 뭔가요.

"경륜 팬들과 관중에게 가장 크게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처음부터 앞서 나가며 끝까지 선두를 지킬 수 있는 힘과 스피드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상위 랭킹 15위권 선수들의 실력은 사실 비슷비슷한데 선행승부를 할 수 있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아요. 일찌감치 치고 나가는 게 여러 선수가 좁은 주로에서 경합하는 것보다 부상 위험을 줄일 수 있어 좋아요. "

▼경기 중 부상 입는 경우가 많은가 보죠.

"결승점을 앞두고는 속도가 시속 70㎞까지 올라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다른 선수와 부딪히거나 해서 낙차(落車 · 자전거에서 떨어지는 것)하면 어디든 부러질 수밖에 없죠.저도 아마추어 시절 갈비뼈가 두 대나 부러진 적이 있어요. "

위험하고 힘든데 왜 경륜을 합니까.

"재미있으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꿈이 사이클 선수였어요. 응암동(서울 은평구)에서 친구들과 함께 여의도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오는 게 어린 시절 가장 큰 오락이었죠.지금도 자동차 운전보다는 자전거를 타는 게 훨씬 재미있어요. 차는 한번 막히면 옴짝달싹 못하는데 자전거는 마음대로 빠져나갈 수 있잖아요. "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할 때 기분은.

"물론 기분이 좋죠.하지만 달릴 땐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시선을 결승선에 고정하고 앞으로 나갈 뿐이죠.다른 선수를 의식하기보다는 제 자신의 플레이에 집중하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첫 번째로 달리고 있구나'라는 생각만 반복해서 해요. "

허벅지 굵기가 엄청나군요.

"지금은 26인치인데 트레이닝하기에 따라 28인치까지 굵어지기도 해요. 어릴 땐 마른 체형이라 허벅지도 볼품없었는데 운동을 하다 보니 굵어졌어요. 짧은 시간에 힘을 최대한 쏟아야 하기 때문에 허벅지 근육이 발달하게 돼요. 최근에는 모 방송사 예능프로그램의 '허벅지 왕' 선발대회에 '탤런트 윤상현을 닮은 허벅지 황태자'로 출연하기도 했죠."

▼훈련은 어떻게 하나요.

"사이클은 같이 훈련하는 하남팀과 함께 탑니다. 집에서 가까운 구파발 등 서울 교외의 차량통행이 적은 도로에서 주로 연습해요. 웨이트 트레이닝 등으로 체력관리도 따로 해줘야 하는데 그건 결국 각자의 몫입니다. 저는 하루 종일 훈련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0시까지 집 근처 피트니스센터에서 땀을 흘립니다. 옆에서 따로 일정을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자기관리가 철저해야 하거든요. "

경마와 달리 경륜은 승부조작이 쉬울 것 같다는 인식도 있는데요.

"시스템상 승부조작은 불가능해요. 선수들은 경기가 시작되는 당일까지도 어떤 경기에서 어떤 선수들과 경주를 벌일지 알 수 없습니다. 선수의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들은 경륜에 돈을 걸 수 없고 경기장에 놀러 오더라도 진행요원을 따라 정해진 자리에만 앉아야 해요. 또 경륜선수는 경륜에 관심 있는 제3자를 만나면 의무적으로 경륜협회에 보고해야 합니다. 오래된 친구들이 농담 삼아 '정보 좀 달라'고 하면 '그런 이야기 할 거면 나랑 평생 볼 생각하지 말라'고 잘라서 말하죠."

제가 경륜에 관심 있는 예쁜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면 만나볼 생각이 있습니까.


"경륜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일단 만나기 힘들어요. 협회에 보고하고 만날 수는 있겠죠,하하.또 그렇게 만나더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밥이든 차든 모두 제가 사야 할 겁니다. "

부친께서 경영학을 전공한 대학 교수님이라고 들었는데 하나뿐인 아들이 운동보다는 공부를 했으면 하시지 않던가요.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지난해 퇴임하셨는데,사이클을 시작할 때부터 제 뜻을 존중하고 끝까지 밀어주셨어요. 장비에 따라 기록 차이가 큰 운동이라 돈이 많이 들어가는데도 아마추어 때부터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셨죠.중 · 고생 땐 일부러 시간을 내 응원하러 오시기도 했고요. 14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저 때문에 아직 재혼을 못하고 계신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아요. "

팬으로서 경륜에 돈을 건다면 딸 자신이 있나요.

"전혀 자신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그날 컨디션에 따라 선수들의 기록이 달라지는 데다 처음 다섯 바퀴를 돌며 위치를 잘못 잡으면 만회하기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죠.저는 잃기만 할 것 같아요. 또 제가 경륜 선수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돈을 경륜에 쓰고 힘들어하는 분들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돈을 걸지 않고 구경만 해도 경륜은 충분히 재미있어요. "

운동을 빼면 인생이 참 재미없을 것 같아요. 술 · 담배도 안 한다면서요.

"그런가요. 운동을 쉬는 날이면 집 근처를 산책하거나 낮잠을 자곤 하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죠.그래도 맛있는 것 먹으러 다니는 건 좋아해요. 특히 일본라면을 좋아하는데 홍익대 근처에 맛있는 집을 몇 군데 알아놓고 동네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가곤 해요. 술은 몸에 안 맞아 못하지만 술 마시는 분위기는 좋아해서 끝까지 술자리를 지켜요. 새벽 두세 시까지 술자리에 있다가 취한 친구들을 집까지 바래다주는 것도 언제나 제 몫이죠."

많을 땐 한 달에 1000만원 이상을 출전료로 받는다고 들었는데 재테크는 어떻게 하나요.

"아버지께 모두 드리고 용돈을 타서 씁니다. 경영학 교수 출신이라 재테크에도 밝으신 것 같더라고요. "

경륜 선수로서 어떤 희망을 갖고 있나요.

"우리나라도 일본과 같은 프로 시스템이 정착됐으면 좋겠어요. 국가가 관리하는 공단 산하에 있다 보니 선수들은 개인사업자로 등록돼 있고,경기규칙에도 규제가 지나쳐 경륜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부분이 있어요. 지원금을 조금 받긴 하지만 장비 구입비와 훈련비를 대부분 선수들이 알아서 충당해야 하는 점도 문제예요. 충분히 제도가 정비되고 저도 개인적으로 성장해서 최고의 경륜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

글=노경목 /사진=강은구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