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일류기업으로 우뚝 선 삼성의 성공요인에 대해,그들 스스로 경영시스템 관점에서 꼽고 있는 비결은 네 가지다. 첫째,사업의 성패를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내는 통찰력에 기반한 오너의 직관(直觀)경영,둘째,과감하게 투자를 결정하고 그 위험을 감수하는 소유 · 경영 일치,셋째,투자리스크 분산이 가능한 선단식(船團式) 경영,마지막에 핵심역량 위주의 사업다각화다.

이런 특징은 창업과 수성,도약을 이뤄낸 우리 대기업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그러한 경영체제를 만들어내고 탁월한 성과를 이끌어낸,삼성만의 비교우위적 경영DNA(유전자)가 있다. 선대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으로 이어지면서 구축된 강력한 리더십,총수를 떠받치는 옛 비서실이나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의 뛰어난 조정능력,두텁게 포진한 전문경영인들로 이뤄진 '삼각 축'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경쟁력의 원천이었다. 예전에는 그랬다.

굳이 '과거'를 강조하는 것은 요즘 삼성의 경영이 옛날 같지 않다는 말들이 자꾸 나오는 까닭이다. 비자금 조성과 로비,그룹 지배권의 편법 승계 등과 관련된 특검과 재판으로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면서 삼성은 1년6개월 전 계열사별 독립경영체제로 바뀌었다. 이건희 회장은 물러났고 컨트롤 타워였던 전략기획실은 해체됐다.

적어도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삼성은 경제위기의 와중에서도 올해 더 돋보이는 실적을 거두고 있다. 삼성전자의 '깜짝 실적'에 이어 지난 2분기 모든 계열 상장사가 흑자를 냈다. 고환율과 중국의 경기부양 효과에 힘입은 결과라지만 계열사별 책임경영의 성취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삼성 경영에 위기의 조짐이 보인다고 할까. 삼성 특유의 선견(先見)과 결단이 실종되면서 장기전략 수립과 선행투자 타이밍을 놓치고 있다는 안팎의 진단 때문이다. 계열사의 각개약진식 독립경영이 단기실적에 몰입돼 있고,계열사 간 사업중복과 충돌이 빚어져도 교통정리가 안 된다고도 한다.

비전제시와 목표설정,전략수립,실행으로 이어지는 사업전개 과정에서 한치 흐트러짐 없던 삼성경영의 DNA가 퇴색하고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삼성의 경영위기론을 황제경영의 부활,세습경영 합리화,선단식 경영 복귀를 노린 책동으로 보는 시각도 물론 없지 않다. 우리 재벌집단 총수의 전횡적 지배구조와 경영의 연결고리를 끊어내지 않고는 공정한 시장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재벌과 선단경영은 여전히 해체와 단절의 대상으로 간주되지만,사실 공허하기 짝이 없는 독단이다. 길지 않은 우리 기업사에서 그러한 지배구조와 경영체제는 환경에 적응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을 모색한 결과다. 같은 이유로 우리보다 훨씬 오래 전 재벌과 선단경영 체제가 구축됐던 곳이 일본이다. 미쓰이 미쓰비시 쓰미토모 등 거대기업들 모두 그런 방식으로 크면서 일본 경제 부흥을 이끌었다.

더구나 후발국의 보잘 것 없는 기업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막강한 세계시장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선진국 거대기업들과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길수 있었겠는가. 자본 · 노동 · 기술 등의 시장기능이 취약한 개발국가에서 가장 효율적인 대안이 재벌체제와 선단식 경영이라는 것은 미국 하버드경영대학원 타룬 칸나 · 크리스나 팔레푸 교수의 논지였다.

삼성은 우리나라 GDP(국내총생산)의 18%,수출의 20% 이상을 떠맡고 있는 기업집단이다. 좋건 싫건 삼성을 떠나 한국 경제를 생각할 수 없고,삼성이 흔들리면 우리 경제 또한 함께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지금 삼성이 처한 딜레마적 상황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삼성이 더 적극적으로 뛰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삼성경영의 DNA 복원이 절실한 때인지 모른다.

논설실장 kunn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