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전자는 지난해 화이트보드처럼 매끈한 제품 겉면에 사인펜으로 글씨와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는 로봇 청소기를 내놓았다. 이 제품의 컨셉트는 '사랑의 메신저'다.

로봇 청소기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LG전자는 소비자들이 직접 댓글을 달 수 있는 기업 블로그 '더 블로그'를 통해 로봇 청소기를 활용한 부부싸움 화해법을 소개했다.

부부싸움 후 안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내.남편은 사인펜으로 '미안해.사랑해'라는 문구를 적어 로봇 청소기를 슬그머니 안방으로 밀어넣는다. 로봇 청소기 덕에 웃음과 함께 아내의 마음이 되돌아왔다는 게 이야기의 전말이다. 사인펜 그림으로 청소기를 애완동물처럼 꾸민 후 '예삐''물방개' 등의 애칭을 붙인 소비자들도 있다는 설명이 곁들여진다.



◆되돌아온 '이야기꾼'의 시대

다른 기업들도 제품과 관련된 '사소한 이야기'를 발굴해 전파하는 데 여념이 없다. 국내 1위 아웃도어브랜드 노스페이스는 최근 '마이 챌린지 캠페인'으로 도전 스토리를 발굴하고 이를 웹사이트에서 확산시키고 있다. 산악인 박영석씨가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기까지의 과정을 들려주며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가 두려워 도전하지 않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자 매일 1000여명이 조회했다. 최근에 올린 영화배우 공효진의 도전 스토리에는 하루 4000여명으로 방문자가 급증했다. 소비자들도 도전 스토리를 올리며 '양방향 스토리'에 동참했다.

완구업체 레고는 한 직원이 상품 포장 과정에서 커터 칼을 잃어버린 얘기를 퍼트려 '안전을 중시하는 기업'이란 이미지를 얻었다. 전 직원이 제작 배송 시스템을 모두 멈추고 공장 전체를 샅샅이 뒤져 칼을 찾아냈다는 얘기를 칼을 분실한 직원과의 인터뷰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알리는 전략이 동원됐다.

기업들의 이야기 마케팅은 전방위적이다. 주인공이 직원이어도 좋고 소비자여도 상관없다. 사람들의 입소문을 탈 수 있는 훈훈하고 재미있는 얘기면 모두 'OK'다.

기업들을 이야기꾼으로 변모시킨 배경에는 '호모나랜스(homo-narrans)'가 있다. 호모나랜스는 '생각하는 사람'인 '호모사피엔스(homo-sapiens)'의 반대 개념.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말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대중매체 발달 후 약화됐던 소비자들의 호모나랜스적 특징이 인터넷 등장 이후 다시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 호모나랜스를 쉽게 설명하면 '디지털 수다쟁이' 정도일 것이다.

제일기획은 최근 15~44세 남녀 600명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바탕으로 호모나랜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인터넷 콘텐츠를 만들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이 자기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흥밋거리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며 △인터넷 카페,블로그,사용후기 등 일반인들이 직접 만든 '위 미디어'(We Media)를 더 신뢰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스토리를 재구성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기존의 아날로그 소비자들이 에펠탑,로마의 콜로세움 등의 유명 관광지를 순회하는 패키지 여행자라면 호모나랜스는 소비자는 골목,골목에 숨은 자신만의 뒷얘기를 찾는 배낭여행자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호모나랜스 소비자들을 겨냥,사업의 구조를 '스토리 양산형'으로 바꾼 기업들도 있다. 수작업 바구니를 만드는 롱거버거는 '이야기를 전파하는 바스켓쇼'를 수시로 개최한다. 행사에 참여한 소비자들은 창업자인 롱거버거의 가족 이야기부터 듣게 된다. 예컨대 어머니가 부활절 계란을 운반하지 못해 쩔쩔맸던 이야기와 신제품 '부활절 바구니'를 함께 소개하는 식이다. 소풍 갈 때 사용하는 바구니,빨래거리를 담아 놓을 때 유용한 바구니 등도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아웃도어 매장에 '비내리는 방'까지

나이키가 커뮤니티 사이트를 운영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전의 나이키는 조깅을 즐기는 소비자를 딱 두 번 만났다. 어떤 제품이 나와 있는지를 보여주는 마케팅,실제 제품을 구매하는 단계에서였다.

소비자들이 원하는 것이 '조깅화'가 아니라 '이야기'라고 판단한 나이키는 소비자들과의 접점을 늘리는 처방을 내놓았다. 달리는 방법을 공유하고 조깅 파트너를 찾을 수 있는 커뮤니티 사이트를 연 것이 시작이었다. 조깅용 음악을 다운로드 할 수 있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달린 거리와 시간을 입력해 실력이 향상되는 속도를 살필 수 있는 코너도 만들었다. 커뮤니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대화 소재를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나이키는 이 같은 변화를 통해 '조깅화 제조사'에서 '조깅 이야기 회사'로 거듭날 수 있었다.

아웃도어 제품을 파는 미국 REI는 8500㎡에 달하는 넓은 매장을 운영한다. 매장 안에 산악자전거 테스트용 산길은 물론 비옷을 입어보는 '비 내리는 방'까지 갖추고 있다. 소비자들이 구매 단계에서 다양한 이야기들을 만들게 한 것이다. 매장 직원들의 역할은 이야기꾼이다. 비 내리는 방에서 벌어졌던 다른 손님의 얘기를 해 준 후 방으로 들어가 볼 것을 고객들에게 권한다.

홍지영 브랜드마케팅연구소 연구원은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기업의 상품을 광고하는 것만으로 호모나랜스들의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 어렵다"며 "앞으로 소비자들이 친숙하게 제품과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열린 구조의 스토리텔링 전략이 다양하게 시도될 것"이라고 말했다.

호모나랜스 시대에는 모두가 이야기꾼이다. 스토리를 만드는 사람의 창작 동력은 재미와 상상력.'작가(author)'에서 '권위(authority)'라는 단어가 파생됐듯이 '문자를 갖고 놀고 상상력을 주무르는' 사람이 곧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storyteller)'이다.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
◇특별취재팀=고두현 차장(문화부) 송형석(산업부) 김정은(생활경제부) 김보라(문화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