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창조경영을 그룹의 경영 화두로 제시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이 회장은 작년 6월 말 계열사 사장단 회의를 통해 "잘 나간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변화의 흐름을 잘 파악해야 한다"며 "과거에 해오던 대로 하거나 남의 것을 베껴서는 절대로 독자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을 원점에서 보고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창조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당시 이 회장이 사용한 '창조'라는 단어는 현실적인 기업 세계에선 잘 쓰지 않는 것이었다.

뜻은 좋은데 뭔가 뜬 구름 잡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회장이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을 기점으로 런던~두바이~요코하마로 이어진 40여일간의 해외 출장 기간 중 창조경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나서면서 '창조'는 일반인들의 귀에도 익은 용어가 됐다.

특히 이 회장의 '창조 여정'은 1993년 68일간의 해외 사업장 순방을 마치고 이른바 '신경영'을 선언했던 상황을 연상하게 했다.

당시 이 회장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는 다 바꾸라"는 말로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역설,사회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패러다임 출현

삼성그룹이 올해 경영방침으로 '창조적 혁신과 도전'을 들고 나온 것은 너무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글로벌 경쟁력 확보','글로벌 일류기업 구현' 등 삼성의 '새 천년'을 주름잡아왔던 경영 슬로건들은 5년여 만에 간판을 내렸다.

삼성이 경영 방침을 창조-혁신-도전으로 이어지는 '창조 경영'으로 전환한 것은 삼성전자를 비롯한 주력 기업들이 이미 상당한 수준의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한 상황인 만큼 앞으로 한 단계 더 높은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영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회장은 올해 신년사를 통해 "삼성은 오랫동안 선진 기업을 뒤쫓아 왔지만 지금은 쫓기는 입장에 서 있다"면서 "앞선 자를 뒤따르던 쉬운 길에서 벗어나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선두에서 험난한 여정을 걸어야 한다"고 밝혔다.

과거 별 볼 일 없는 전자업체에서 일본 업체들의 기술을 모방해 선두에 올라선 삼성이지만 이제 안심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않으면 도태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했다.

그만큼 현재 삼성이 처한 위기가 예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심각한 상황이라는 게 이 회장의 진단이다.

실제 삼성의 성장세는 2004년을 정점으로 완연한 피로증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141조원으로 13조5000억원을 올린 1987년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지만 최근 3년간은 답보를 해왔다.

주력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상황도 좋지만은 않다.

반도체 부문이 제품값 하락으로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고 휴대폰 사업부는 노키아 등 글로벌 톱기업과의 격차를 좀처럼 줄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전자 계열사들의 상대적인 부진은 중공업 엔지니어링 소재 등 전통 제조업종의 호황으로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창조경영이라는 화두는 일시적인 성공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생존력과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느냐를 묻고 있다.

현재 삼성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해결하는 동시에 미래의 경쟁력을 항구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라

삼성은 창조경영을 구현하는 주요 축은 일단 '기술의 컨버전스'로 집약된다.

기술의 융·복합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갈수록 복합화되는 고객과 시장의 새로운 요구에 대응하는 수단으로서 필요한 전략이다.

당뇨 진단과 각종 검사결과를 휴대폰의 기능으로 통합한 이른바 '당뇨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자유로운 상상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더라면 당뇨병 환자와 휴대폰 고객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발상은 어려웠을 것이다.

컨버전스 전략은 또 시·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현대적 경영환경에서 경쟁자들은 전혀 뜻밖에 장소에 뜻밖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월마트의 최대 경쟁자는 타겟과 같은 동종업체가 아니라 인터넷 검색업체인 구글이 될 수도 있다.

고객들이 구매를 결정하기 전에 가장 싼 가격을 안내해 주는 사이트를 찾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003~2004년 국내 조선업체들은 최고의 수주실적을 올렸지만 그 과실은 포스코와 같은 후판 제조업체들이 독식했다.

중국발 경기호황이 철판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들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렸고 그 여파로 국내 조선업체들은 적자 건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조일훈 기자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