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터를 뭐라고 생각하세요?"

그가 기자에게 물었다.

이런 질문은 대개 기자가 취재원에게 던지는 게 수순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골치 아픈 질문을 취재하러 온 기자에게 먼저 던졌다.

기자가 머뭇거리는 사이,그는 마치 자문자답하듯 "모니터는 책상 위의 조각작품입니다"고 말했다.

LG전자의 모니터 디자인을 책임지고 있는 DD&M(Digital Display&Media) 디자인연구소의 박세라 책임연구원(36).

서울 강남구 역삼동 GS타워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모니터를 제품이라 부르지 않고 작품이라고 규정했다.

"모니터가 조각작품이라니.허풍이 심하구먼." 이런 생각이 든 순간 그가 디자인한 모니터가 눈에 들어왔다.

이글아이 시리즈,판타지 모니터 등.실제로 단순한 모니터가 아니라 조형물이라는 느낌이었다.

◆디자인은 DNA를 불어넣는 일

'모니터=조각품'이라는 생각은 디자인에 대한 그의 철학 때문이다.

"조각가는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디자이너는 제품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전원이 꺼져도 조각품처럼 책상 위에서 생명력을 발할 수 있는 IT(정보기술)제품이 되도록 하는 게 내 일"이란다.

그래서 그는 모니터가 주위 환경에 녹아들 수 있도록 디자인한다.

"대개 PC와 모니터는 방에 놓는다.

침대 책상 의자 책장 같은 가구는 서로 잘 어울린다.

하지만 모니터는 혼자 불쑥 튀어나와 있다.

꺼져 있을 때 화면이 시커멓기 때문이다.

주위의 다른 사물이나 배경과 잘 어울려 사용하지 않을 때도 살아 있는 모니터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이런 독특한 가치관 때문일까.

그는 LG전자의 수많은 디자이너 중에서도 특별한 존재다.

지난해 말 LG전자가 처음으로 뽑은 2명의 슈퍼디자이너 중 한 명이 됐다.

다른 한 명은 초콜릿폰을 디자인 한 차강희 책임연구원.슈퍼 디자이너가 된 뒤 그의 역할은 더욱 막중해졌다.

모니터뿐 아니라 TV 홈시어터 AV 등 디자인 영역이 넓어졌다.

그는 올해 LG전자가 비밀 병기로 삼는 제품과 주력 제품군에도 투입됐다.

◆자동차에서 모니터로

그는 원래 자동차 디자이너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1994년 기아자동차에서 자동차 디자이너로 출발했다.

카니발을 디자인한 것이 바로 그다.

기아에서 LG전자로 옮겨온 것은 1997년 11월.좀 더 소프트하고 섬세하며 소비자들과 자주 대면할 수 있는 제품을 디자인하고 싶어서 옮겼다.

물론 자동차 경험은 그에게 큰 밑천이 됐다.

"디자이너는 갇히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점에서 자동차 디자인을 경험한 것이 남들과 차이를 내는 원동력이 됐다."

당시 모니터 디자인은 불모지였다.

'모니터에 무슨 디자인이 필요해'라고 할 때였다.

그의 실력은 4년 뒤인 2003년 '이글아이'에서 빛났다.

모니터의 전원 부분을 독수리 눈처럼 둥그스름하게 약간 밑으로 튀어나오도록 디자인 한 것이 히트를 쳤다.

딱딱하고 차가운 이미지인 모니터에 부드럽고 여성적인 터치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원은 사람들이 모니터를 쓰면서 가장 많이 만지는 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좀 더 편안하고 부드럽게 하고 싶었어요."

그는 이글아이로 2004년 한국 굿디자인(GD) 산자부장관상을 받았다.

이어 그해 독일의 iF와 레드닷,일본GD상까지 휩쓰는 그랜드슬램의 주인공이 됐다.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주지아르(Giorgetto Giugiaro)는 2005년 박 연구원이 디자인 한 이글아이 모니터를 보고 "이것은 디자인이 아니라 한 편의 시"라고 감탄했다.

지난해에는 '판타지'라는 새로운 디자인의 모니터로 주목을 받았다.

고급스런 검은색 외관에 곡선의 미를 더 살렸다.

이 제품 이후 검은색과 곡선은 모니터의 공식처럼 됐다.

◆IT디자이너의 길

그는 국내외에서 많은 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을 또다른 시작을 위한 총성으로 여긴다.

그는 상을 받을 때마다 자신에게 말한다고 한다.

"몸을 더 낮추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들자.나는 아직 나를 전부 보여준 것이 아니야.사람들이 놀랄 만한 디자인의 제품을 만들어야지."

박 연구원과 동고동락하고 있는 전명섭 책임연구원은 "박세라 책임의 별명이 밤새라 책임"이란다.

"한 번 물면 놓지 않는 승부근성 그리고 끝까지 마무리하는 프로 정신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성공한 디자이너인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선배이길 바란다.

글=임원기·사진=김정욱 기자 wonk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