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준화를 중심으로 하는 프랑스 대학교육은 실패의 길로 가고 있다.

대학교육의 대개혁(Grand Reform)이 필요하다.

" 프랑스의 최고 대학으로 꼽히는 소르본 대학의 장 로베르 피트 총장은 9일 "대학의 평준화로 프랑스 고등교육이 양적으로는 성장했지만 질적으로는 크게 뒤처지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피트 총장은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글로벌 HR포럼 이틀째인 이날 안현실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과 대담을 갖고 고등교육에도 경쟁의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 대담 = 안현실 한경 논설위원 ]

안현실 위원=프랑스 대학이 미국이나 영국에 비해 경쟁력을 잃고 있다는 보도가 많다.

재정적 위기,정부의 평준화 정책 등의 탓으로 분석된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소르본 대학에도 이런 문제점이 있나.

피트 총장=맞는 분석이다.


프랑스 대학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 이유는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학이 국립대학인 탓이다.

국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지만 액수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교육의 질이 떨어진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기업 스폰서를 많이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자들도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프랑스 학자들은 그동안 기업들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대학이 갖고 있는 이데올로기와 기업의 철학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제는 산학연계를 발달시켜야 한다.

기업들의 중요한 역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불신을 없애야 한다.

한국 기업들은 대학에 많은 기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또 프랑스 대학은 돈 많은 학부모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시스템도 도입해야 한다.

둘째로 평준화 문제다.

프랑스의 고등학교 졸업자들은 예비고사(바칼로레아)만 합격하면 모두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의 질이 떨어진다.

대학기능을 살리기 위해선 평준화를 없애고 경쟁 원리를 도입해야 한다.

안 위원=1968년 학생 혁명으로 만들어진 대학 평준화 정책이 실패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나.

(프랑스는 1968년 대학의 문호를 개방하라는 학생들의 요구로 모든 대학들을 통합,평준화시켰다.

이에 따라 소르본 대학도 행정적으로는 파리 4대학이라 불린다)

피트 총장=그렇다.

물론 완전히 실패했다고 말할 순 없지만 질적으로 많이 뒤처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대학교육의 대개혁이 필요하다.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프랑스의 고등교육시스템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 대학과 그랑제콜(Grands Ecole·세분화된 분야별로 엘리트를 육성하는 특수목적 대학)이다.

그랑제콜에는 정부가 엄청난 재정 지원을 한다.

하지만 그랑제콜은 연구기능이 없다.

이곳 출신들은 주입식 교육만 받았다.

그래서 연구하고 고찰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반면 소르본과 같은 일반 대학은 오랜 역사의 연구기능을 갖고 있지만 재정이 턱없이 부족하다.

등록금도 없고 정부의 지원도 그랑제콜에 비하면 초라하다.

이 두 기관을 통합해야 프랑스 고등교육이 성공할 수 있다.

안 위원=한국에서도 일부에서 서울대를 폐지하고 대학교육을 평준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피트 총장=모든 사람들이 평등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영미권의 대학들은 그 우수성에 1,2,3위 등 순위가 매겨져 있다.

프랑스에는 이런 시스템이 없는 게 문제다.

모든 국가는 사회를 이끌 능력 있는 엘리트가 필요하다.

이들은 그 국가에서 가장 뛰어난 대학에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

1등급 대학에서는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 2등급 대학은 기능적인 교육에 주력해야 한다.

특히 지방대학들은 새로운 분야를 육성해 나름의 특성을 가져야 경쟁력 있는 대학이 될 수 있다.

안 위원=대학과 기업의 관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한국 기업들도 국내 대학에 굉장히 불만이 많다.

대학을 졸업해도 기업들이 다시 모든 걸 가르쳐야 한다는 비난이다.

그런데 비난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 같진 않다.

기업들의 역할도 있을 것 같다.

피트 총장=그렇다.

기업들이 무조건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면 고등교육에 기업도 적극 참여해야 한다.

우선 교육 프로그램을 만드는 데 기업도 참여해야 한다.

또 단기 인턴십이 아니라 입학해서 졸업할 때까지 장기적으로 기업에서 연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교수의 영역으로만 남아 있던 학생 평가에도 기업이 적극 나서야 한다.

안 위원=지난 봄 프랑스에서는 CPE(최초고용계약제도:26세 미만의 근로자를 고용했을 때 최초 2년간은 별다른 사유 없이 해고할 수 있는 제도)에 대한 대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있었다.

프랑스에는 청년실업률이 매우 높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무조건 반대하는 게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다.

피트 총장=일차적으로는 정부가 정책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던 게 문제다.

말씀하신 대로 프랑스는 청년실업률이 높다.

CPE는 학생들이 일단 기업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다.

프랑스 기업들은 젊은이들을 고용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기본적으로 영구고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 2년간 학생들은 소프트하게 일을 배우고 기업들은 싼 값으로 인력을 사용하는 윈-윈 정책이다.

미국 캐나다 등은 이미 이런 제도가 잘 발달돼 있다.

사실 당시 시위의 배후에는 좌파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회당,공산당 등이 뒤에서 학생들을 부추긴 면이 있다.

이런 말들이 외국에서 나온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다.

안 위원=당신은 세계적인 지리학자다.

노무현 정부의 국가균형발전 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피트 총장=사실 수도 이전이 한창 이슈이던 2004년 나는 한국을 방문해 수도를 옮기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균형발전은 매우 중요하다.

수도와 지방이 각각의 역할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균형발전을 위해 행정기능을 옮기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행정은 수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

두 번째 기능은 지방으로 보내도 된다.

한국 정부가 착각하는 게 있다.

초고속 전철도 있고 인터넷과 휴대폰 등 각종 통신수단도 발달했다는 것.하지만 이런 것들에 중요한 정책 결정을 의존할 수는 없다.

안보와 같은 중요한 기능들은 긴밀하게 모여 있어야 한다.

방법은 각 기능에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수도에만 모든 기능이 몰려 있는 것도 문제고 그 반대도 문제다.

기능별로 중요도를 매겨 수도는 수도로서의 기능을 갖고 지방은 지방 나름대로의 기능을 갖게 해야 한다.

안 위원=최근 한국의 부동산값이 폭등하고 있다.

정부의 각종 정책이 부동산 가격을 더 올리고 있다는 비난도 많다.

피트 총장=주택 문제를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구 소련은 국가가 부동산 가격 등 모든 것을 결정하다가 붕괴됐다.

부동산도 수요와 공급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

정부는 공공임대주택 같은 사회적 주택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이런 주택들의 질이 너무 떨어지는 것도 문제다.

아무튼 국가가 너무 과도하게 부동산시장에 간여하다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봤다.

안 위원=한.미FTA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특히 한국의 교육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는가?

피트 총장=한국은 미국을 절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국은 동북아에서 매우 강한 나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기업들도 많다.

최근에는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했고 정치적으로도 많이 발전했다.

무엇보다 한국은 정체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한국인으로서 자존심과 자부심을 갖고 있다.

미국은 위험한 나라는 아니다.

물론 실수도 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미국과의 우호관계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교육시스템에도 긍정적이라고 본다.

현재 수많은 한국 학생들이 미국,유럽,심지어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있다.

역으로 미국 학생들이 한국에 와서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FTA는 경제적 차원 뿐 아니라 교육,문화 등 여러가지 것들을 교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한.미FTA가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지 않는다.

한국은 성실한 나라다.

또 다이내믹한 나라다.

한국이 IMF 외환위기를 만났을 때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한국은 이미 단단한 나라다.

그동안 쌓아놓은 게 많다.

안 위원=2004년 말 노무현 대통령이 소르본 대학을 방문해 "유럽연합(EU)에서 프랑스의 역할과 같이 한국도 동북아에서 중심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장께서도 당시 그 자리에 계셨던 것으로 안다.

동북아에서 한국의 위치에 대한 노 대통령의 의견에 동의하나?

피트 총장=한국이 중국이나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한국은 정체성을 갖고 있는 나라다.

중국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중국이 과거와 같이 중화주의에 입각한 제국주의적 정책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내부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상황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북아를 EU와 같은 경제공동체로 발전시키는 것에 대해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유럽은 대부분의 국가들이 비슷한 규모로 이뤄져 있지만 동북아는 다르다.

중국은 너무 규모가 크고 성장 속도도 무서울 정도다.

섣불리 경제 블록을 만들었다가 한국과 일본이 중국의 위성국가로 전락할 수도 있다.

안 위원=당시 노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 외에도 전 세계에 많은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한 견해는?

피트 총장=동의한다.

한국은 전 세계의 나라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다양한 국제적 파트너를 갖는 것은 중요하다.

경제적인 측면 뿐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특히 한국과 중국,한국과 일본,일본과 중국의 관계를 긴밀하게 발전시켜야 한다.

특히 북한 문제에 대해 3국이 우정을 갖고 쉽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 미국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정리=유창재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