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부 출범이래 몇가지 중요한 경제정책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대기업그룹
정책의 색채가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고 최근에는 그 타당성을 둘러싼
논쟁이 재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신관리의 축소, 출자규제와 부당내부거래규제의 강화, 업종전문화 유도
시책, 공기업민영화와 사회간접자본(SOC)민자유치, 소유분산의 강조와 그룹
집중식 경영구조(소위 선단식 경영)비판 등이 대기업그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조치들이다.

이 정책들은 각각 방향성을 갖고 움직이고 있으나 종합적으로 볼때
대기업규제의 강도가 상당수준 약화된 것이 사실이고 이점에서 현정부의
경제정책은 친대기업이라고 비판되고 있다.

특히 경기확장에도 불구하고 업종간 대.소기업간 양극화현상이 심화되면서
자율화와 규제완화의 혜택이 대기업에만 귀속되고 대기업그룹의 자본력이
확대되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몰락현상이 더욱 심화된다는 주장도 일부
에서 제기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경쟁여건이 급변하는 현시점에서 대기업그룹정책
이 어디로 가야 하느냐라는 문제는 대기업그룹의 국민경제적 역할에 대한
장기비전을 가지고 엄밀한 사실확인과 건전한 논리에 따라 풀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한다면 대기업그룹정책은 경기의존적
표류현상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며, 정책의 일관성 결여로 정부와 재계의
반목은 해소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백화점식 규제의 강약을 되풀이하는 대기업그룹정책은 국민
경제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대기업그룹정책의 개혁을 위한 실마리는 우리의 잘못된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

대기업그룹은 왜 전문화하지 않고 끊임없이 문어발식 다변화를 추구하는가.

그들은 왜 언론을 소유하려 하고 금융기업을 가지려 하는가.

대기업그룹의 소유집중은 어떻게 나타난 현상인가.

대기업그룹의 국민경제적 비중, 다변화, 소유집중과 그룹식 경영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러한 모든 의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은 우리 경제사회의 인센티브구조에
있다.

즉 우리 경제의 보상체계가 구조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대기업
그룹은 다변화할수록, 언론과 금융을 지배할수록 성공할 확률이 컸으며,
소유가 집중된 상태에서도 기업규모확대가 가능하였다.

그동안 대기업그룹정책의 단적인 문제점은 인센티브구조를 치유하지 않고
그들의 기업활동을 직접 규제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기업그룹은 상당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규제를 우회할수 있었고,
그 결과가 대기업그룹의 현재 모습이다.

21세기초 우리 경제의 재도약을 위하여는 현재의 대기업들이 효율과 성장을
선도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선진경제라면 그 필요조건인 고성장이 지속되어야
하며, 성장을 위한 대기업그룹의 역할은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대기업그룹해체와 같은 극약처방은 선택가능한 대안이 될수 없다.

효율의 주체로서 대기업그룹의 역할을 보장하면서 이들의 폐해를 시정하는
유일한 방안은 다음과 같이 인센티브구조를 개혁하는 것 뿐이다.

첫째 전문화와 다변화를 둘러싼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할 필요가 있다.

다변화의 근본적 원인은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에서 경쟁이 미약하여 도처에
이윤기회가 널려있고 기술력은 취약하기 때문이다.

우선 기술력에 한계가 있는 상태에서 자금만 집중한다고 경쟁력이 강화될
수는 없기 때문에 전문화는 한계가 있다.

우리경제에서 의미있는 두가지 경쟁은 외국기업과의 경쟁및 대기업그룹간의
경쟁뿐인데 국내생산자를 보호하는 개방화시책이나 중복과잉투자를 우려하는
진입규제나 투자규제는 오히려 다변화의 유인을 제공한다.

따라서 문어발에 대응하여 정부가 인센티브구조를 개혁하려면 진정한 시장
개방과 경쟁이 도입되어야 한다.

경쟁이 도입되면 대기업은 여기저기 한눈 팔 겨를이 없고 핵심능력을 배양
하여 정면승부할수 밖에 없으며 현재의 사업구조를 스스로 정리할 것이다.

정부로서는 적절한 타이밍만 조절하면 된다.

둘째 대기업그룹의 국민경제적 비중은 고성장이 해결할 것이다.

고성장기에는 중소기업의 저변이 확대되어 국민경제의 재벌집중도는 완화
되지만 저성장기에는 오히려 생존능력이 강한 기업이 살아남는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최근의 양극화과정에서 중소기업부도가 늘고 있으나 신설업체가 부도업체
보다 많다는 사실은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산업지원시책의 핵심은 일부 경공업 도.소매업 건설업의 부실중소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시책이 되어야 할것이며 대기업그룹 규제강화가 중소
기업대책이 될수는 없다.

향후 대기업그룹의 국민경제적 비중과 관련하여 정부가 주의할 분야는
공기업민영화와 SOC민자유치이다.

민영화와 민자유치는 그 본질이 동일한 사안인데 만약 대기업이 충분한
자구노력없이 공기업을 인수하거나 SOC에 참여한다면 대기업의 재무구조
악화, 민간투자의 구축효과와 함께 경제력집중의 급격한 심화가 우려된다.

즉 규제가 능사가 아니라 인센티브를 왜곡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셋째 소유분산은 궁극적인 정책목표로서 부적합하다.

차입경영이 상대적으로 유리하고 자본시장이 발달하지 않는 한 소유분산은
요원한 과제이다.

당초 소유분산이 거론된 배경은 모든 것을 법대로 하자는 것이며 여기에는
징세행정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

소유분산은 세법과 기업공개라는 정공법으로 기업이 성장함에 따라 해결될
뿐이다.

넷째 이웃 일본에서도 지주회사부활론이 제기되는 마당에 정부가 일정한
경영구조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경쟁이 도입되면 비효율적인 경영구조를 가진 대기업그룹은 망하게 마련
이다.

소유와 경영의 문제에 있어 정부가 신경써야 할 점은 우리기업에 적합한
지배구조의 모색을 위한 주식회사제도의 정비와 경영의 투명성 확보이다.

주총 이사회 감사 기관투자가 등과 관련된 제도의 개선과 연결재무제표의
의무화등은 정부의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다.

다섯째 대기업그룹정책의 대상이 30대그룹에서 더욱 축소되어야 할것이다.

빅2,빅4,빅10이 하위그룹과 동등한 선상에서 취급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지주회사역할을 하는 주력계열사와 여타 계열사의 분화와 같은 계열관계의
변화도 정부가 유의할 사항이다.

과거의 대기업그룹정책이 당근과 채찍이었다면 당근이 바닥나고 있는
지금 과거의 채찍은 더이상 효력이 없다.

(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 9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