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예술과 과학의 만남…제3 문화의 탄생
지난해 국내에서 화제를 모은 전시 중 하나는 부산현대미술관의 설치작 ‘레인룸’이다. 지난해 8월부터 5개월여 동안 6만6000여 명의 관람객을 모았다. 100㎡의 공간에 비가 내리도록 설치해 놓은 레인룸에서 관람객들은 빗속에서 빗줄기를 보고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비를 맞지 않는 경험을 한다. 정교한 카메라와 인체를 감지하는 센서 추적 시스템이 수천 개의 물 밸브를 여닫으며, 관람객을 감싸는 ‘보이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독일 아티스트 그룹 ‘랜덤 인터내셔널’의 작품이다. 그런데 최첨단 테크놀로지로 만들어낸 이런 공간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서 I 밀러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명예교수는 레인룸처럼 과학과 기술의 영향을 받은 예술을 ‘아트사이(artsci)’라고 부른다. 밀러 교수는 《충돌하는 세계》에서 예술과 과학의 협업과 충돌이 빚어낸 현대예술사를 들려준다. 다양한 아트사이 작품을 소개하며 사람들이 예술 하면 떠올리는 고정된 이미지를 깨뜨린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그린 그림과 작곡한 음악, 유전자를 조작해 형광색으로 빛나는 토끼, 앉으면 온몸으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의자, 원자력현미경을 통해 촬영한 나노 단위 수준의 산맥 이미지 등이다.

저자는 1966년 뉴욕 맨해튼의 한 허름한 건물에서 열린 ‘아홉 개의 밤: 연극과 공학’ 행사를 현대 아트사이의 출발점으로 잡는다. 앤디 워홀, 마르셀 뒤샹, 로버트 라우션버그, 존 케이지 등 당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모인 이 행사를 주도한 사람은 물리학자 빌리 클뤼버였다. 그는 공학자들을 불러모아 예술가들이 그들의 아이디어를 구현해낼 수 있도록 독려했다. 클뤼버가 품은 유토피아적인 비전은 과학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없애는 것이었다.

저자가 현대미술사의 긴 여정을 추적한 뒤 다다르는 아트사이의 미래는 클뤼버의 비전과 비슷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예술, 과학, 기술은 사라지고 서로 융합돼 제3의 문화가 탄생할 것이며 아직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미래의 아방가르드를 위해 가능성을 열어놓게 될 것이다.”(구계원 옮김, 문학동네, 544쪽, 2만2000원)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