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가 스위스 제네바를 대신해 러시아산 석유의 최대 교역지로 떠오르고 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19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수십 년간 러시아산 원유가 유통돼 온 스위스가 유럽연합(EU)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하면서 글로벌 원유 거래의 지형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분석이다.

FT는 러시아 세관 문서에 기반해 올해 1~4월 UAE의 무역 회사들이 러시아산 석유를 최소 3900만t 사들였다고 전했다. 170억달러(약 21조5000억원)가 넘는 규모로, 이 기간 러시아 세관에 신고된 수출량의 3분의 1에 달한다. 이 중 10%만 UAE로 수입됐고, 나머지 90%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세계 각지로 흘러 들어갔다.

같은 기간 러시아산 원유를 취급하는 상위 20개 무역업체 중 8개가 UAE에 등록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젤 등 정제 제품 취급 업체 중에선 상위 20개 중 10개가 UAE 기업이었다. UAE 최대 원유 저장 탱크가 들어서 있는 동부 항구 도시 푸자이라로 유입된 러시아산 원유는 지난해 12월 14만1000배럴로 사상 최고치를 찍었다. 지난달까지 평균 유입량은 10만5000배럴 선을 유지했다.

UAE는 전 세계에서 8번째로 큰 산유국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주요 회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원유 거래량은 많지 않았다. 아부다비석유공사(ADNOC)가 자체 무역 사업부를 만든 것도 불과 3년 전이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신흥국들의 석유 수요가 급증하면서 거래 시장이 규모를 키우기 시작했다.
자료=파이낸셜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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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제공업체 케이플러에서 중동 지역 고객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매트 스탠리는 “당신이 원유 거래상이라면 UAE에 있고 싶어할 것”이라며 “두바이는 새로운 제네바가 됐다”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UAE의 매력을 끌어올린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중립국인 스위스가 유럽연합(EU)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면서다. 대외적으로 ‘정치 중립’을 표방하고 있는 UAE는 이 같은 제재 리스크에서 거리가 멀다. 주요 7개국(G7)과 EU 중심의 무역 제재는 스위스와 같이 이들 기구의 규칙을 따르는 국가들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미국 등은 러시아산 원유가 가격 상한 밑에서 거래되기만 한다면 제재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일부 회사들은 두바이 자회사를 활용해 가격 상한 규제마저 피해 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례로 25년 넘게 스위스에서 에너지 무역 사업을 해 온 ‘파라마운트 에너지 앤 코모디티즈’는 지난해 러시아 관련 사업을 UAE에 등록된 자회사로 완전히 이전한 뒤 상한을 웃도는 가격에서 러시아산 원유를 판매해 왔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더해 석유 트레이더들에게 별도의 개인 소득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점도 이점으로 작용했다. 두바이에 위치한 한 무역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FT에 “UAE는 모든 거래와 유통이 자유롭게 이뤄질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러시아 특수’가 끝나더라도 ‘오일 허브’로서 UAE의 입지는 쪼그라들지 않을 거란 전망이다. UAE의 인프라를 높게 평가한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바이의 신생 기업 몽포트(Monfort)는 지난 5월 독일 유나이퍼로부터 원유 정제 시설을 시세 대비 높은 가격에 매입했다.

UAE의 한 무역업자는 “러시아 사태를 계기로 UAE가 떠오르기 시작했지만, 이는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며 “관련 금융 상품들이 확대되면서 유럽 기반 트레이더들도 두바이로 뛰어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스탠리 분석가는 “(UAE의) 시스템에 대한 믿음이 형성되고 있다”며 “UAE가 더 이상 일시적이 아닌 영구적 거래처가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