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비아 레코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파이어스톤 타이어…. 이들의 공통점은 1980년대 버블경제가 한창일 무렵 일본의 소니, 세존그룹, 브리지스톤이 사들인 미국 기업들이란 점이다. 당시 일본 기업들은 미국의 20세기를 상징하는 대표 기업들을 '트로피 수집하듯' 인수했다.

일본 정부가 나서 "미국 자산 인수합병(M&A)을 자제하라"고 경고할 정도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1989년 '뉴욕 맨해튼의 중심' 록펠러 센터를 인수한 미쓰비시는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2년여 뒤 버블경제는 붕괴했고, 일본의 잃어버린 30년이 시작됐다.

"일본 내에선 먹을 게 없다" 美시장 확장 나선 日기업들

지난달 일본 부동산 회사 모리 트러스트가 맨해튼 245 파크 애비뉴 건물의 지분 49.9%를 매입했을 때 전 세계는 다시 한번 놀랐다. 중앙은행(Fed)의 고강도 긴축 이후 미국 상업용 부동산 시세가 폭락하고 있는 국면이란 점에서다. 모리 트러스트는 해당 건물을 사는 데 20억달러(약 2조6000억원)를 들였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2일(현지시간) "3명의 M&A 전문 변호사들에 의하면 최근 일본의 다른 대형 부동산 개발업체들도 미국 자산 투자를 추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코로나19 봉쇄 조치가 끝나고 부동산 현장실사가 가능해지면서 그동안 억눌려져 있던 수요가 봇물처럼 터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흐름은 버블경제 시절과는 달리 일본 기업들의 생존 전략으로 보인다는 게 FT의 분석이다.

일본 M&A 부티크 JIC의 로셸 코프 대표는 "이번엔 미국의 상징적 부동산을 트로피처럼 휩쓸었던 과거 버블경제 시절과는 다르다"며 "더 많은 일본 기업들이 매출의 일정 비율을 해외에서 창출하고 싶어하며, 이는 기업 전략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말했다. 인구 감소, 내수시장 축소 등 일본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기업들로 하여금 해외 확장에 눈을 돌리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로펌 DLA파이퍼의 마사히코 이시다 수석 M&A 변호사는 "일본 기업들은 아웃바운드(해외진출) M&A를 더 많이 할 수밖에 없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日금융사도 美투자은행 지분 확보해 '만반 준비'


일본 3대 금융그룹도 이 같은 흐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미국 금융사와의 '지분 혈맹' 등을 통해서다. 올해 5월 일본 미즈호는 미국 투자자문회사 그린힐을 5억5000만달러에 인수했다. 그린힐은 미즈호의 미주지역 M&A 부서에 편입될 예정이다. 지난달엔 미쓰이스미토모 파이낸셜그룹(SMFG)이 보유 중인 미국 투자은행 제퍼리스 지분을 15%까지 늘렸다.

코프 대표는 "향후 폭발적으로 늘어날 일본 기업들의 아웃바운드 M&A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 금융권이 신속하게 움직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라며 "일본 금융권은 '우리 기업이 해외 M&A를 진행하면서 설마 골드만삭스에 자문을 맡기진 않겠지'라는 믿음으로 투자은행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세계 최대 규모인 미국 투자은행 부문과의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자문 수수료를 수익원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M&A컨설팅기업 BDA파트너스 일본지사의 제프 액튼 공동 대표는 "미중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는 일본 기업의 미국 자산 인수가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더 환영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미중 갈등은 또 다른 순풍"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반대 시각도 제시했다. 일본 금융사들이 투자자문 역량을 확대하는 것은 해외 기업들의 일본 자산 인수(인바운드 M&A)에서 거래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란 반론이다. 제레미 화이트 변호사는 "일본 기업의 저평가된 밸류에이션, 개선된 지배구조, 엔저 등을 타고 일본에 진출하려는 해외 바이어들의 수요를 포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