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2027년부터 2nm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하겠다고 발표한 일본의 민관 합작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 日 반도체 부활 전략 뜯어보니(7)에서 살펴본 것처럼 라피더스의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게 대체적인 평가다.

하지만 성공을 점칠 만한 요인도 있다. 라피더스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역시 미국과 유럽연합(EU)의 전폭적인 지원이다. 최첨단 반도체 생산에는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확보가 필수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EUV 장비 주문량도 따라서 느는데 ASML의 연간 생산량은 50대 안팎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전자와 TSMC가 EUV 장비를 먼저 확보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거나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담판을 위해 네덜란드 ASML 본사를 방문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다.

라피더스는 생산기술도, 공장도 없지만 EUV 장비를 이미 두 대나 확보했다. 라피더스에 기술을 제공하는 벨기에 imec이 ASML과 공동개발한 EUV 노광장치를 우선 공급하는 덕분이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주도했다가 실패한 산업재편과 라피더스는 두가지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일본 재계에서 자주 쓰는 자조 중에 “일본은 기술에서 이기고 사업에서 진다”라는 표현이 있다.

일본 기업들이 기술력을 과신한 나머지 독자성을 고집하다가 세계의 흐름에서 멀어지는 ‘갈라파고스화’한다는 뜻이다. 소비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쓸고퀄(불 필요할 정도로 품질이 높아서 가격만 비싼 제품)' 제품을 만들어 스스로 자멸하는 사례가 수십년째 반복되고 있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라피더스 프로젝트에는 NEC와 기오시아 등 반도체와 전자업체 뿐 아니라 도요타자동차, 소니그룹, 덴소 등 반도체를 구매하는 고객 기업이 함께 참여했다. 자동차 자율주행, 인공지능(AI) 등 고객 기업의 구체적인 제품을 염두에 두고 개발을 할 수 있게 됨에 따라 '갈라파고스화'를 예방할 수 있게 됐다.

개발 방식도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일본 기업이 독자적으로 개발한다는 고집을 꺾었다. 라피더스는 부족한 기술을 미국과 유럽의 지원으로 채우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하고 있다. 제휴회사인 미국 IBM과 벨기에 imec에 일본인 기술자를 파견해 기술을 습득할 방침이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일본 경제산업성 관계자는 "지금까지 정부 주도의 산업재편은 일본 전자기업의 반도체 부문을 모은 '약자 연합'의 색채가 강했기 때문에 세계 시장 경쟁에서 번번히 패배했다. 라피더스는 반도체 기술의 전환기를 맞아 일본 대표 기업들이 설립한 회사여서 과거와는 전혀 의미가 다르다"고 강조했다.

라피더스가 20년의 격차를 5년 만에 극복하고 2027년부터 2nm 반도체를 양산한다고 하더라도 과제는 여전하다. 반도체는 규모의 경제로 승부하는 산업이다. 대규모 설비투자와 기술개발로 수율(웨이퍼 한 장에 설계된 최대 칩의 개수 대비 합격품의 비율)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생산단가를 최대한 낮추는데서 승부가 난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라피더스가 최첨단 반도체 양산에 성공하더라도 가격 경쟁력에서 삼성전자와 TSMC의 상대가 될 가능성은 '제로(0)'에 가깝다는 분석이다. 최근에 만난 반도체 기업 고위 관계자는 "라피더스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은 틈새시장 공략"이라고 잘라 말했다.

히가시 데쓰로 라피더스 회장이 최근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공개한 생존 전략은 이 관계자의 예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히가시 회장은 "주문량이 적어서 삼성전자나 TSMC가 받아주지 않는 고객을 개척할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도 처음엔 그랬다"…日 반도체 전략 성공 점치는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반도체 수요 급증으로 삼성전자와 TSMC는 큰손 고객을 우선순위로 둘 수 밖에 없다. 최첨단 반도체를 활용해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기업이 소량으로 내는 주문은 제때 맞춰주기 힘들다.

반대로 새 서비스를 개발하려는 기업들은 가격이 비싸더라도 납기를 최대한 앞당기는 것을 중시한다. 히가시 회장은 삼성전자와 TSMC가 커버하지 못하는 소형 고객의 소량 주문량에서 승부를 보겠다고 밝힌 것이다.

라피더스의 성공 가능성은 여전히 높지 않아보인다. 하지만 삼성전자가 1974년 반도체 사업에 처음 진출했을때 성공 가능성을 점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반도체 강국 한국이 일본의 반도체 산업 전략을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