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엔? 1천엔?…일본인이 불안할 때 늘어나는 지폐는 [정영효의 인사이드 재팬]
일본의 최고액권인 1만엔(약 10만2695원) 지폐의 유통량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일본인들이 느끼는 불안감이 커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우리나라도 5만원권 환수율(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가 회수된 비율)이 코로나19 확산 이후 급감했다.

일본은행 통계에 따르면 2020년말 기준 1만엔권 유통량은 110조엔으로 전년보다 5.3% 늘었다. 최근 수년간 2~4% 수준이었던 증가율이 2015년 이후 처음으로 5%를 넘었다. 10년전과 비교해서는 1만엔권 유통량이 1.5배 늘었다.

지폐와 동전을 포함한 전체 화폐 유통량은 123조엔으로 1만엔권이 차지하는 비중은 90%를 넘는다.

화폐 유통량은 중앙은행이 발행한 화폐 가운데 회수된 금액을 뺀 수치다. 2012년말 취임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실시해 시중에 막대한 돈을 푼 이후 1만엔권 유통량은 매년 늘고 있다. 작년 4월에는 일본 정부가 소비진작을 위해 전 국민에게 1인당 10만엔씩 현금을 지급하면서 1만엔권 유통량이 더욱 늘었다.

한편으로는 일본인들이 1만엔권을 쓰지 않고 모아둔다는 의미기도 하다. 구마노 히데오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아사히신문에 "1만엔권의 증가는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졌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감염의 공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 쌓이면서 보관이 간편한 1만엔권을 집에 모아두는 일본인이 늘었다는 것이다. 은행 지점이나 현금자동입출금기(ATM) 이용횟수를 줄여 조금이라도 코로나19 감염위험을 낮추려면 한번에 돈을 많이 뽑아둬야 한다는 심리도 1만엔권 유통량을 늘린 이유로 분석된다.

일본은 신용카드와 각종 페이를 포함한 '캐시리스(cashless)' 이용률이 여전히 30%대에 그치는 현금 왕국이다.

일본은행이 5년 넘게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펼치면서 은행에 돈을 맡길 이유가 사라진 점도 일본인들이 집에 현금을 보관하는 이유로 꼽힌다. 다이이치생명연구소는 1만엔권을 집에 보관하는 '장농예금' 규모가 작년말 55조5000억엔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우리나라도 고액권이 제대로 회수되지 않는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은행이 2009년 6월부터 발행한 5만원권 227조원 가운데 절반이 넘는 116조원은 시장에 유통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민주당 이광재(원주갑·3선) 의원이 지난해 9월 한국은행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다.

특히 코로나19가 본격적으로 확산한 작년 1~7월 5만원권은 15조3000억원이 발행됐는데 4조8000억원만 회수됐다. 한국은행의 2018년 경제주체별 현금 사용 행태 조사에서 거래용 현금의 권종별 구성비는 5만원권 43.5%, 1만원권 45.5%로 비슷했다. 반면 예비용 현금은 5만원권 79.4%, 1만원권 18.6%로 5만원권이 보관 용도에 주로 활용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액권인 1000엔권 유통량은 4조5000억엔으로 지폐 가운데 유일하게 줄었다. 우에노 쓰요시 닛세이기초연구소 선임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로 가게를 찾는 손님이 줄어들면서 잔돈 수요가 줄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온라인으로 결제가 가능한 인터넷 쇼핑이 급증한 점도 현금거래에 많이 쓰이는 1000엔권의 유통을 줄인 요인으로 꼽힌다.

반면 500엔 동전은 3.9% 늘어난 2조5000억엔어치가 유통됐다. 10년 전보다 유통량이 1.3배 늘었다. 동전 가운데 단위가 가장 큰 500엔은 전용 저금통에 한푼 두푼 모으는 마니아층이 있기 때문에 회수율이 낮다는 설명이다.

일본 사회에 유통되는 현금이 늘어도 일본인들의 주머니 사정은 오히려 나빠졌다. 후생노동성의 월간근무총계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인 근로자 1명이 현금으로 받은 월급은 평균 31만8000엔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