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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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리스크 커진 글로벌 석유·가스 시장
반사이익 얻은 서방 에너지 메이저들 신규 자원에 적극 투자


엑슨모빌과 로열더치셸 등 서방 석유 업계의 '슈퍼 메이저' 기업들이 중동과 러시아 등 분쟁 지역을 버리고 아프리카와 남미 등 남반구로 대거 진출하고 있다. 전쟁으로 인한 유럽 에너지난 덕분에 지구 온난화와 관련해 일부 '면죄부'를 얻은 기업들은 다시 새로운 유전을 찾아 나섰다. 오래된 시설은 매각하고 미주 지역과 아프리카 등에서 새로운 유전을 탐사한 뒤 환경을 덜 오염시키는 최신 시설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지난해 서방의 메이저 6개 기업만 해도 총 2000억달러(약 265조원)의 순이익을 올리는 등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운 덕분이다.

그동안 생산량 기준으로 1위 사우디아라비아 아람코를 비롯해 러시아 로스네프트, 이란 석유공사 등 비(非)서방 기업들이 원유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했다. 한국도 원유 수요량의 30%를 사우디에서 공급받는 등 해마다 중동산 원유 수입 비중이 60~80%에 이른다. 전통 산유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출 것으로 기대됐던 셰일혁명도 2020년 유가 폭락 이후 잠잠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와 나토(NATO)의 대결 구도가 뚜렷해지면서 서방 에너지 기업들은 중동과 러시아에 대한 의존을 줄이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중심 산유국 협의체 OPEC+의 영향력이 서방 석유 메이저 기업들의 약진으로 또 한번 흔들릴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그린 에너지 미루고 유전 탐사 '기지개'

31일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 등 외신에 따르면 서방의 메이저 석유 기업들이 신규 유전 탐사와 생산시설 확충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리서치 기업 S&P글로벌에 따르면 2020년 팬데믹의 여파로 15년 만에 최저 수준인 3500억달러 규모로 줄어든 전 세계 업스트림(자원 탐사) 자본 지출이 지난해 약 4500억 달러로 다시 증가했다.

석유 메이저 기업들의 투자는 최근 2년 간의 막대한 이익 덕분이다. 엑슨모빌, 셰브런,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 셸, 토탈에너지, 에퀴노어 등 서방 에너지 6개 기업의 작년 순이익은 총 2000억달러를 넘어섰다. 엑슨모빌은 557억 달러의 사상최대 순이익을 기록했다. 셰브론도 매출은 2021년의 1625억 달러 대비 52% 늘어난 2463억달러, 순이익은 355억달러로 각각 사상 최고였다. 올 들어서도 엑슨모빌은 1분기 114억달러의 순이익을 내며 1분기 기준 역대 최대 기록을 갈아치웠고, 셰브런 역시 전년 동기보다 늘어난 66억달러의 순이익을 기록하는 등 대형 석유 기업들은 일제히 순항중이다.

서방 석유 기업의 '횡재'는 산유국 러시아의 몰락 때문이다. 작년 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원유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고,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재제가 더해지면서 원유값은 지난해 6월 배럴당 120달러까지 치솟았다. 사우디아라비아·미국과 석유 생산량 선두를 다투던 러시아가 갑자기 글로벌 달러화 결제망에서 배제되자 전세계 기업들은 서방 메이저 기업으로 달려갈 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중국과 인도 등 몇몇 소수 국가에만 석유를 팔고 있다.

2021년 리오프닝 국면에서도 메이저 정유사들은 적지 않은 이익을 봤다. 코로나19 사태로 각 국의 셧다운이 잇따르면서 원유(선물) 가격이 2020년 중반 마이너스까지 내려갔고, 중소형 에너지 기업들은 대거 나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에서 환경운동가들이 로열더치셸 주주총회장 주변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영국 런던에서 환경운동가들이 로열더치셸 주주총회장 주변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해 각 국 정부가 이른바 ‘횡재세’ 부과를 검토한 것도 결국은 석유 메이저 기업에 호재가 됐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석유 업계가 터무니 없이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면서 “(유가 인하를 위한) 증산에 투자하지 않는 기업들은 초과 이익에 대해 더 많은 세금을 내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 밀려 수 년간 석유·가스 투자를 줄이고 신규 유전 탐사도 중단해야했던 석유 기업들은 생산을 늘릴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에너지 기업들은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지구 온난화의 주범으로 손가락질 받았으나, 지난해 에너지난을 겪고난 뒤로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다. 2020년 당시 '10년안에 석유 가스 생산량 40%를 줄이겠다'고 했던 버나드 루니 BP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파이낸셜타임즈(FT)의 "전 세계 정부와 사회가 에너지 시스템에 투자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2019년 생산량 기준으로 2030년까지 25%만 줄이기로 목표를 수정했다"고 말했다.

안전한 앞마당에 집중하는 미국·유럽 에너지 기업

미국과 유럽의 에너지 기업들은 지정학적 위험에 대비해 석유·가스 투자처를 자국과 가까운 남미와 아프리카 등으로 각각 옮기고 있다. 이코노미스트는 "지정학적, 경제적, 환경적 요인의 소용돌이로 인해 '슈퍼 메이저'는 점점 더 동쪽과 서쪽이 아닌 남북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고 전했다. 에너지 기업들은 분쟁 지역은 물론 노후 시설과 채산성이 의심되는 자산을 적극적으로 매각하고 있다. 고유가 시대 과잉투자로 대거 손실을 본 전례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미국 기업인 엑슨모빌과 셰브런 등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자산을 대거 처분하는 대신 자국 내 셰일가스와 남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엑슨모빌은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후 러시아 사업을 포기했다. 카메룬, 차드, 적도 기니, 나이지리아 등의 아프리카 자산도 처분하기 시작했다. 셰브론은 영국과 덴마크의 프로젝트를 매각했고,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채굴권이 만료되는 광구를 갱신하지 않았다.

대신 엑슨모빌은 베네수엘라와 수리남 사이의 작은 나라인 가이아나 앞바다에서 2015년 새로 발견한 유전 지역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2019년부터 본격 생산에 들어갔고 지난해 추가로 유전이 발견기도 했다. 셰브런은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의 재제 완화로 최근 베네수엘라산 원유 거래를 재개했다. 베네수엘라는 그동안 미국으로부터 '불량 국가'로 간주돼 재제를 받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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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브런은 올해 자본 지출의 3분의 1 이상을 미국 셰일가스에, 나머지 20%도 멕시코만에 투자할 계획이다. 셰브론은 지난 22일엔 76억 달러를 들여 콜로라도의 PDC에너지(PDC)를 인수했다. 셰브론의 덴버-줄스버그 분지 생산량은 하루 26만 배럴이상 늘어날 전망이다.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기업들은 러시아와 중동 대신 아프리카로 몰려가고 있다. 영국 BP는 앙골라, 아제르바이잔, 이라크, 오만, 아랍에미리트에서 철수를 추진하고 있다. 멕시코의 석유 관련 자산도 매각중이다. BP와 셸은 러시아에서도 철수하면서 각각 250억달러와 50억달러의 자산을 상각했다. 셸은 미국 텍사스의 셰일가스 관련 자산을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토탈은 캐나다의 오일샌드 관련 자산을 내다 팔고 있다.

셸은 대신 노르웨이의 국영 석유 회사인 에퀴노르와 손잡고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에 300억 달러 규모의 액화 천연가스(LNG) 터미널을 건설하기로 했다. 토탈에너지는 모잠비크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가스 프로젝트에 투자를 시작했다. 낡은 시설들은 향후 환경 규제의 빌미가 될 것으로 예상해 적극적으로 내다팔고 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