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U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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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우리의 돈이 필요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우리의 노하우다."

미 정부 고위당국자는 9일(현지시간) 미국의 대중 투자 제한 조치를 발표하면서 규제 도입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국이 원하는 건 미국의 자본이 아니라 기술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기술에 해당하는 노하우는 투자와 함께 수반되기 때문에 중국 관련 투자에 족쇄를 채웠다는 게 이번 조치의 핵심이다. 미국의 첨단기술이 중국에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면 투자를 막을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투자 연동된 기술 유출 방지"

백악관이 이날 내놓은 행정명령은 미국의 투자에 따라 중국에 미국 기술이 넘어가는 것을 차단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미국 정부 고위 관계자는 브리핑에서 "중국은 순자본 수출국이기 때문에 우리 돈이 필요하지 않다"면서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노하우이며 이런 노하우는 특정 유형의 투자와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주무부처인 재무부는 보도 참고 자료를 통해 규제 배경을 설명했다. 재무부는 "미국의 투자에는 경영지원, 투자·인재 네트워크, 시장 접근 등 기업이 성공할 수 있는 무형의 이익이 통상 수반된다"고 밝혔다.

재무부는 이날 중국 투자에 대한 세부 규정 예고안도 발표했다. 한국으로 치면 입법예고에 해당한다. 재무부는 향후 45일간 관계부처와 산업계의 의견을 청취한 뒤 세부 규정 초안을 발표한다.

이후 또다시 각종 의견을 취합해 최종 규정을 내놓을 계획이다. 규정 시행 시기는 특정하지 않았지만 업계에선 빨라야 내년에 시행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첨단기술 과반인 중국 기업 투자 제한

미국의 이번 조치는 선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전면 통제에 가까웠던 지난해 10월 반도체 수출 규제 때와는 온도 차가 난다는 얘기다.

실제 미국은 반도체와 양자(퀀텀) 기술, 인공지능(AI) 등 3대 첨단 기술 투자 규제에 초점을 두되 차등적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기술별로 안보에 큰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투자를 금지하고 그렇지 않은 분야는 신고 대상으로 뒀다.

반도체에선 첨단 반도체의 설계와 제조, 패키징에 관한 기술은 투자 금지 대상으로 규정했다. 첨단이 아닌(less advanced) 반도체는 신고 대상으로 정했다. 첨단 반도체 기준은 재무부가 업계 의견을 듣고 정할 방침이다. 업계에선 지난해 10월 대(對)중 반도체 수출 통제에서 정한 첨단 반도체와 구형 반도체 기준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양자기술 분야에선 양자 컴퓨터, 특정 양자 센서, 양자 정보 기술에 관련된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금지했다. 보안 통신 및 시스템과 관련 없는 양자 기술은 규제 대상에서 제외했다.

투자 규제 대상이 되는 중국 기업도 특정 영역으로 한정했다. 3대 첨단기술의 매출이나 순익, 투자, 영업비용 등이 전체 사업에서 50% 이상인 중국 기업에 대한 투자를 규제하기로 했다.

투자를 제한하는 거래 유형도 인수합병, 사모펀드, 벤처캐피탈 등을 통한 지분 인수, 합작 투자, 주식 전환이 가능한 특정 채무 금융 거래 등이다. 다만 주식 시장을 통한 거래, 인덱스펀드, 뮤추얼펀드 등 간접 투자에 대해서는 규제를 면제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했다.

반도체 협회 "의견 수렴 환영"

사진=로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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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도체업계의 반응도 이전과 달랐다. 반도체 수출 때는 각종 우려를 전달했지만 이번엔 업계 의견을 듣기로 한 미국 정부의 입장을 환영했다.

미 반도체산업협회(SIA)는 이날 성명을 통해 "정부 조치 발표 내용을 검토하고 있으며 공개 의견수렴 기간 업계가 의견을 제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을 환영한다"라고 밝혔다.

이어 "최종안은 미국 반도체 기업이 공정한 경쟁의 장에서 경쟁하고 중국을 포함한 주요 세계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를 기대한다"며 "이를 통해 미국 반도체 산업의 장기 경쟁력을 높이고 글로벌 경쟁업체를 능가하는 혁신 능력을 촉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SIA에는 인텔, 퀄컴, 엔비디아 등 미국 주요 반도체 기업을 회원사로 두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TSMC 등도 글로벌 회원사에 속해 있다.

지난달 SIA는 미 정부의 추가 수출통제가 예상되자 "지나치게 범위가 넓고 모호하고, 때로는 일방적인 제한을 부과하기 위한 반복적 조치들은 미국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약화하고 공급망을 교란할 우려가 있다"면서 "이는 상당한 시장 불확실성을 초래하고 중국의 보복 조치 확대를 촉발할 수 있다"고 비판했다.

워싱턴=정인설 특파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