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탄소배출권이 유럽보다 대폭 할인된 가격에 거래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정부가 최근 자국 산업계의 탄소배출량을 사실상 눈감아주는 탄소배출권 거래제도 변경안을 발표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일각에서는 이번 조치가 기업 투자 촉진과 물가 안정세로 이어질 것이란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반면 다른 쪽에서는 "장기적으로 저탄소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 경쟁력을 해친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영국 탄소배출권거래제에서 탄소배출권 가격은 최근 t당 47파운드까지 주저앉았다. 이는 t당 88.5유로(약 75.8파운드)에 거래되고 있는 유럽연합(EU)의 탄소배출권에 비해 40% 가까이 할인된 가격이다.

30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두 탄소배출권 거래시장은 이전까지 항상 비슷하게 움직였지만, 영국 정부의 잇단 '녹색 후퇴' 행보로 가격 격차가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고 전했다. 영국 정부가 기후위기 대응에 사실상 손을 놓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영국 산업계가 지불해야 하는 '오염 비용'을 더 저렴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발전업체를 포함한 영국 산업계는 2021년 도입된 탄소배출권거래제에 따라 정부로부터 합법적인 탄소배출권을 일정량 할당받고 있다. 기업이 할당량 미만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면 할당량에서 실제 배출량을 뺀 초과분을 다른 업체에 팔아 수익을 거둔다. 또 탄소저감에 성공한 기업은 더 적은 양의 배출권을 구매함으로써 비용을 절약할 수도 있다. 이 제도를 통해 정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할당량을 줄여 기업들이 배출권을 구매하기보다 배출량을 줄이도록 유도한다.
英의 '녹색 후퇴'…산업계 탄소배출량 허용치 대폭 늘려줘 [김리안의 에네르기파WAR]
하지만 이달 영국 정부는 "전반적인 탄소배출량 상한선을 낮추고자 산업계에 더 많은 배출권을 할당하겠다"고 발표했다. 오는 2024년부터 2027년까지 민간 기업들에 약 5350만t의 추가 할당량을 허용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는 시장 예상보다 훨씬 많은 양으로, 그간 영국 탄소배출권거래제가 허용해온 배출량의 대략 반년치에 해당할 정도다. 또 운송업계에 대한 유예기간은 2026년까지 늘리기로 했는데, 이는 EU 조치보다 2년 뒤처진다.

탄소배출권 가격의 폭락으로 발전사업체들의 부담이 줄어듦에 따라 영국 전기료도 덩달아 안정세를 되찾고 있다. 최근 영국 전기요금은 유럽 대륙의 전기료보다 낮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번 정부 조치가 기업들의 투자를 촉진하고 물가를 끌어내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기적 호재에 불과할 뿐 장기적으로는 국익에 반하는 조치라는 반론도 나온다. 탄소배출권 가격이 높게 유지되어야만 기업들이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재생에너지에 대한 투자를 확대할 것이란 이유에서다. 재생에너지는 전환 속도가 빨라질수록 생산 단가가 낮아지고 에너지 안보에 도움이 된다.

에너지UK의 애덤 버만 부국장은 "아주 잠시 낮은 가격을 누리기 위해 종국에 가격을 더 낮출 수 있는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푼돈을 아끼고 큰돈을 낭비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제임스 헉스텝 BNP파리바 애널리스트는 "이번 정부 발표는 앞으로 영국의 탄소발자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탄소 시장과 거래 참여자들이 적응할 시간을 주면서 원활한 전환 국면을 보장하기 위해서 이번 조치를 낸 것"이라면서 "이월 배출권을 추가한 것일 뿐 탄소 저감 총량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