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 내각이 저출산과 함께 임금 인상을 올해 양대 중점 정책으로 정했다. 글로벌 인플레이션을 기회로 삼아 ‘잃어버린 30년’으로 불리는 장기 침체의 주범인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다.

기시다 총리는 지난 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저출산 대책에 도전할 것”이라며 “올해 춘계 임금 협상(춘투)에서 물가 상승률을 뛰어넘는 임금 인상을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임금 인상에 정권 명운 걸려

디플레 탈출 절박한 日…정부가 기업에 "임금 올려라"
기시다 총리는 이날 임금 인상과 저출산 대책은 “더 이상 뒤로 미뤄둘 수 없는 문제”라며 “어떻게든 실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임금이 매년 늘어나는 구조를 만들 것”이라고 강조했다.

저출산 대책에 대해선 오는 6월 내놓을 ‘경제재정 운용과 개혁의 기본 방침’(호네후토 방침)에서 “어린이 관련 예산을 두 배로 늘리는 등 큰 틀을 제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매년 6월께 발표하는 호네후토 방침은 이듬해 경제 정책과 예산 편성의 기본 방향이 된다. 기시다 총리는 이어 4월 1일 발족하는 어린이가정청의 오구라 마사노부 장관에게 “관련 정책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다만 어린이 예산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쉽지 않다. 재원을 마련하려면 사회보험료를 올리거나 증세하는 게 불가피하다.

기시다 내각이 임금 인상과 저출산 대책을 주요 과제로 정한 것은 소비를 늘려 만성 디플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다. 치솟는 물가를 잡는 데 고심하는 다른 나라와 정반대 움직임이다.

에너지와 식량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일본도 작년 하반기부터 물가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다. 지난해 11월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은 3.7%로 40여 년 만에 최고치를 나타냈다. 하지만 같은 달 미국 CPI(7.1%)의 절반 수준이다.

문제는 임금 상승률이 물가를 쫓아가지 못하면서 일본인의 실질 임금이 7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실질 임금이 감소하자 내각 지지율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또 소비 침체도 우려된다. 이 때문에 임금 인상은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가 됐다. 일본 정부는 임금 인상률을 물가 상승률 이상으로 높일 수 있다면 소비가 늘고 물가가 안정적으로 오르면서 디플레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관제춘투’ 성과 낼까

재계와 노조도 기업에 임금 인상을 촉구하고 나섰다. 지난달 1일 일본 최대 노동조합인 렌고는 올해 임금 인상률 목표를 ‘5% 정도’로 제시했다. 렌고는 지난 10여 년간 임금 인상률 목표를 3%대로 제시했다. 5%대 인상을 요구한 건 1995년 이후 28년 만이다.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렌의 도쿠라 마사카즈 회장도 최근 기자회견에서 “물가 상승률에 뒤지지 않는 수준의 임금 인상”을 회원 기업들에 요청했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임금을 높이려고 하지만 장애물이 만만치 않다고 분석했다. 2014년 아베 신조 총리 내각의 임금 인상 요구를 시작으로 일본은 정부가 춘투를 지원하고 있다. ‘관제춘투’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다.

관제춘투를 시작한 뒤 일본 정부는 줄곧 3% 이상의 임금 인상을 기업에 요구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동안 최고 임금 인상률은 2015년의 2.38%에 불과하다. 아사히신문은 “기시다 총리가 임금 인상을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충분히 제시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