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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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일본 맥주시장에서 기린의 점유율은 37.1%로 35.2%에 그친 아사히를 밀어내고 2001년 이후 처음 1위에 올랐다. 기린의 점유율이 전년보다 1.9%포인트 상승한 반면 아사히 점유율은 1.7%포인트 떨어진 결과다.

아사히는 맥주시장 점유율 50%가 넘는 ‘슈퍼드라이’를 보유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주류업계에서 기린의 1위 탈환은 기적으로 평가받는다.

◇점유율 50% 브랜드 갖고도 역전패

아사히가 점유율 50%의 브랜드를 갖고서도 1위자리를 내준 것은 시장이 통째로 변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맥주시장은 맥주 외에 발포주와 다이산, 주하이(일본소주를 탄산수로 희석한 음료) 등으로 구성된다. ‘신(新) 장르’라고도 부르는 다이산은 맥주의 주원료인 맥아를 전혀 쓰지 않고 맥주맛을 내는 알콜음료다.
아사히, 20년만에 日 맥주시장 1위 빼앗긴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지난해 다이산은 2004년 출시된 이후 처음으로 맥주를 제치고 맥주계 음료 시장 1위가 됐다. 원조보다 아류가 더 커지면서 아사히의 독무대였던 맥주 시장은 쪼그라 들었다.다이산의 점유율은 46%로 1년새 6%포인트 늘어난 반면 맥주는 41%로 7%포인트 줄었다.

슈퍼드라이에 밀려 맥주에서는 맥을 못추는 기린이지만 다이산 시장에서는 최강자다. 기린의 다이산 브랜드 ‘혼기린’은 16개월 연속 판매량이 증가하며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일본 맥주시장의 판도가 바뀐 건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이다. 외출제한과 휴업, 영업단축으로 이자카야에 납품하는 업소용 맥주 판매가 급감했다. 맥주 시장의 절반 이상은 업소용 맥주가 차지한다. 긴급사태가 선언된 작년 4~5월 4대 맥주회사의 업소용 맥주 매출은 80~90% 줄었다.

반면 맥주보다 알콜도수는 0.5도 가량 높으면서 가격은 100엔(약 1100원) 싼 다이산의 수요는 급증했다.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사람이 늘면서 가성비가 중시됐기 때문이다.

기린은 주력 맥주 브랜드인 ‘이치방시보리’의 판매량이 24% 줄었다. 하지만 다이산 1위 혼기린 덕분에 전체 매출량(1억3000만 상자)은 전년보다 5% 줄어드는데 그쳤다. 맥주 출하량(6517만 상자)이 22% 줄어든 아사히는 이를 만회할 대체상품이 부족했다. 전체 맥주 매출의 절반 이상을 슈퍼드라이에 의존하는 탓이었다.

◇日맥주시장 1970년대 후반으로 후퇴

전문가들은 맥주시장의 판도 변화를 ‘슈퍼드라이병(病)’에 걸린 아사히가 ‘라거병’을 고친 기린에 패했다고 평가한다. 슈퍼드라이의 성공에 취해 사업재편을 외면한 아사히가 끊임없이 사업을 재편한 기린에 졌다는 의미다.

1987년 출시한 슈퍼드라이가 시장점유율 70%를 달성하자 아사히는 ‘브랜드병’에 걸리고 말았다. 슈퍼드라이에만 회사의 전력을 의존하는 외다리 경영이 이어졌다.

저출산·고령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국내 시장이 위축되는 현실은 애써 외면했다. 지난해 일본 4대 맥주회사의 판매량은 16년 연속 감소했다. 현재 일본 맥주시장 규모는 1994년 전성기에 비해서는 40% 작고, 1970년대 후반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런데도 아사히 내부에서는 ‘드라이 추종세력’이 미래를 대비해 다른 브랜드를 키우려는 시도를 견제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아사히가 32년 만에 외부에서 영입한 임원인 마쓰야마 가즈오 마케팅 본부장(전무)은 “사내에서 특별대접을 받던 슈퍼드라이 담당 부서가 다른 브랜드 및 주종의 육성을 견제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장을 내부승진시켜 기업의 계속성을 유지하는 일본 재계의 풍토는 장점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아사히에서는 장점마저 약점이 됐다. 주력 사업부인 슈퍼드라이의 책임자가 대대로 경영진을 장악하면서 슈퍼드라이에만 의존하는 전략을 수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사히는 사업을 다각화하는 대신 슈퍼드라이의 브랜드 가치 향상에 경영자원을 집중했다. 2016년까지 2조4000억엔을 투자해 해외 기업 인수·합병(M&A)을 진행했다. 일본 맥주사업과 연계해 슈퍼드라이를 글로벌 브랜드로 육성하려는 목적이었다. 이미 정점을 지나버린 맥주시장의 현실을 감안하면 성공하기 힘든 전략이었다. 슈퍼드라이는 2000년 판매량 1억9000만 상자를 돌파한 이후 내리막을 걷고 있다.

◇新 장르 맥주·건강식품으로 승부

기린은 아사히와 반대의 길을 갔다. 역설적으로 맥주 시장에서 슈퍼드라이를 이길 수 없었던 덕분에 발포주와 다이산 등 새로운 장르를 꾸준히 개발했다.

20여년 만에 1위를 탈환한 기린도 ‘라거병’에 걸린 경험이 있다. 1970년대 ‘라거’ 브랜드가 일본 시장의 60%를 점유하자 변화를 거부했다. 시장 트랜드가 병맥주에서 캔맥주로 변하는데도 병맥주를 고집한 결과 캔맥주에 주력한 아사히에 선두를 내줬다.

그런데도 2000년대까지 기린은 ‘매출 3조엔, 해외 매출 3할’이라는 목표 아래 해외기업을 인수해 덩치를 키우는데만 주력했다. 이익보다 매출을 중시한 해외 M&A는 수익성에 기여하지 못했고 2015년 상장 이래 처음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2015년 취임한 이소자키 요시노리 기린홀딩스 사장은 저수익사업을 과감하게 정리했다. 지난해에도 호주 음료사업을 현지 기업에 409억엔을 받고 팔았다.

또 주류 대신 유산균과 같은 건강식품사업을 주수익원으로 키우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술보다 건강 보조식품의 성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맥주 시장 점유율이 3위인 산토리홀딩스는 일찌감치 무알콜 음료와 건강보조식품에 손을 댄 덕분에 4대 맥주 회사 가운데 매출과 영업이익이 가장 크다.

기린도 ‘건강의 기린’을 내걸고 2024년까지 건강사업의 이익을 전체의 10%까지 늘린다는 목표를 세웠다. 2019년 교와발효바이오를 1300억엔에 인수하는 등 사업다각화에 나서고 있다. 기린이 라거병을 고치는데 20여년이 걸렸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