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 NOW
로테르담항 자동화 RPG 터미널에서 하역 대기중인 HMM 컨테이너선. 사진=빈난새 기자
로테르담항 자동화 RPG 터미널에서 하역 대기중인 HMM 컨테이너선. 사진=빈난새 기자
항구는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이 적막했다. 북해를 마주 보고 선 거대한 크레인이 항만에 정박한 대형 화물선으로 팔을 뻗었다. 거대한 40피트 컨테이너 2개를 한 번에 들어 올린 크레인이 밑에서 기다리던 무인 화물차(AGV) 위로 컨테이너를 내렸다. 100% 전기로 구동하는 AGV는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 스스로 움직였다. 어떤 차는 야적장으로, 또 다른 차는 트럭이나 더 작은 연안선을 향해 컨테이너를 날랐다. 유럽 최대 항구인 네덜란드 로테르담항 마스블락테2 APM터미널의 모습이다.

터미널 안에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로봇 크레인, 화물차와 항구 곳곳에 우뚝 선 거대한 풍력터빈만 묵묵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63빌딩(248m) 높이의 초대형 풍력터빈 한 기는 1만6000가구에 공급할 수 있는 양의 전기를 생산한다. 마틴 반 오스턴 로테르담항만공사 홍보담당관은 “이곳 APM 터미널은 100% 풍력발전에서 생산된 전력으로 운영되는 탈탄소 항구”라며 “올해 말부터 로테르담항 내에서 그린 수소를 생산하기 시작해 6년 후에는 유럽 전역에 수소를 운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로테르담항 내 윈드터빈. 사진=빈난새 기자
로테르담항 내 윈드터빈. 사진=빈난새 기자
항만 자동화 첨병에서 탈탄소 리더까지

로테르담항은 전 세계 항만 자동화의 첨병이다. 연간 처리하는 화물이 4억6000만 톤, 컨테이너 물량은 1450만TEU에 달하는 이 항구엔 매년 약 14만 척의 선박이 드나든다. 항구 전체 면적은 네덜란드 국토의 0.5%에 이를 만큼 거대하다. 말 그대로 ‘유럽의 관문’인 셈이다. 로테르담항은 급증하는 물류를 보다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자동화에 앞장서고 있다.

1993년 세계 최초로 반자동화 터미널을 구현한 데 이어 2015년에는 APM 터미널을 필두로 무인 자동화 하역 시스템을 최초 도입했다. 2018년에는 인공지능(AI) 기반 스마트 항만 시스템으로 진화시켰다. 선박과 크레인, AGV와 트럭 등 터미널을 움직이는 모든 것을 사물인터넷(IoT)과 클라우드, AI로 연결했다. 국내 최대 항구인 부산항이 올해 도입한 무인 자동화 시스템을 9년 앞서 시작한 것이다. 로테르담항이 개발한 각종 물류·항만 서비스 소프트웨어는 전 세계 수십 개 항구가 돈을 주고 사서 쓸 정도다. 로테르담항은 향후 무인 자율 주행선 시대에 대비해 항구의 ‘디지털 트윈’을 구축하는 방안도 준비 중이다.
로테르담항 자동화 APM 터미널 AGV. 사진=빈난새 기자
로테르담항 자동화 APM 터미널 AGV. 사진=빈난새 기자
로테르담항은 이제 ‘탈탄소 에너지 항구’로 또 한 번 진화하고 있다. 유럽 최대 그린 수소 허브가 되겠다는 것이 목표다. 그린 수소는 풍력·태양광 같은 재생에너지로 물을 전기분해해 생산한 수소다. 생산 과정에서 탄소배출이 없는 진정한 친환경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다.

로테르담항이 발 빠르게 탈탄소 전환에 나선 것은 역설적으로 이곳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석유(오일) 허브 항만이기 때문이다. 항만업계 관계자는 “로테르담항은 전체 부지의 41%에 달하는 대규모 석유화학 클러스터를 배후 산업단지로 두고 유럽 곳곳으로 이어지는 정유 파이프라인을 보유하고 있다”며 “탈탄소 규제 강화에 대응해 근본적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형상 재생에너지 발전이 쉽고, 바다를 통해 대규모로 수소를 수입할 수 있는 로테르담은 그린 수소를 생산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실핏줄 같은 하천과 육로, 파이프라인을 통해 독일과 벨기에, 프랑스 등 유럽 내륙으로 수소를 운송할 수 있는 인프라를 풍부하게 갖춘 것도 강점이다. 신진선 부산항만공사 로테르담법인장은 “로테르담항은 수소 생산부터 수입, 저장, 운송에 이르기까지 수소 생태계 전반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착착 실행 중”이라고 전했다.

유럽 수소경제의 중심지 될 것

로테르담항은 마스블락테 부지 내에만 9곳의 수소 시설을 짓고 있다. 완공되면 연 2.5GW급 수전해 설비로 그린 수소를 생산할 수 있다. 영국 셸·BP, 독일 티센크루프·RWE·유니퍼, 프랑스 에어리퀴드 등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앞다퉈 투자했다.

가장 먼저 뛰어든 셸은 축구장 800개와 맞먹는 부지에 10억 유로를 들여 연 60만 톤 규모의 네덜란드 최초 그린 수소 생산 공장을 짓고 있다. 이르면 올해 말부터 그린 수소 생산을 시작한다. 수소 생산에 필요한 전력은 해상풍력발전으로 조달한다.
로테르담항에 건설중인 수소생산기지. 사진=빈난새 기자
로테르담항에 건설중인 수소생산기지. 사진=빈난새 기자
블루 수소 생산도 대안이다. 블루 수소는 액화천연가스(LNG), 암모니아 등 화석연료 개질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제거한 수소다. 그린 수소만큼은 아니지만 탄소배출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청정 수소로 분류된다. 로테르담항은 연간 250만 톤 규모의 이산화탄소를 저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 탄소포집 및 활용·저장(CCUS) 사업 실증을 추진하고 있다. 이렇게 포집한 탄소를 북해 밑으로 옮겨 저장한다는 계획이다.

수소 수입도 중요한 축이다. 로테르담항은 수소 수입 인프라를 갖춘 5곳의 터미널도 준비하고 있다. 유럽 차원의 수소 수입량을 2022년 560만 톤에서 2030년 2000만 톤까지 늘리겠다는 유럽연합(EU)의 계획에 발맞춰서다. 니코 반 도오른 로테르담항만공사 에너지 전환 담당관은 “도전적인 목표인 건 사실이지만,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러시아로부터 에너지 독립을 가속화하려면 지속가능한 수소 생태계 구축이 필수”라고 강조했다.

수소 허브의 핵심인 운송 인프라도 발 빠르게 갖추고 있다. 로테르담항과 네덜란드 내 주요 산업단지를 연결하는 1단계가 마무리되면 2030년에는 독일과 벨기에까지 수소 파이프라인이 연결될 예정이다. 이 파이프라인은 2040년까지 유럽 28개국을 이을 ‘유럽 수소 파이프라인’과도 이어진다. 반 오스턴 담당관은 “로테르담항이 수소경제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항구가 에너지 전환의 동반자로

이처럼 에너지 전환을 주도하는 로테르담항은 하역·운송업 같은 전통적 항구 사업에 대한 의존을 탈피한 지 오래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로테르담항이 단순 터미널 운영을 통해 얻은 부가가치 비중은 17.3%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부가가치는 벙커링, 선박금융, 항만 배후 단지 건설, 운영 사업 등에서 올린다. 이에 비해 부산항은 기본 터미널 운영에 60%의 부가가치가 쏠려 있다. 세계경제포럼(WEF) 조사에서도 한국의 항만 서비스 효율은 2019년 기준 세계 11위로 주변국인 싱가포르(1위), 홍콩(4위), 일본(5위)보다 낮게 나타났다.

KMI 관계자는 “한국은 수출입 화물의 99.7%를 해상운송에 의존할 만큼 해운·항만산업의 중요성이 크지만, 아직 하역·운송업 외 서비스의 부가가치 창출력은 낮은 수준”이라며 “항만 물동량 성장세가 둔화하고 선박 대형화로 입항 선박도 감소하는 상황에서 세계 주요 항구와 경쟁하려면 항만 연관 산업에 대한 투자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로테르담(네덜란드)=빈난새 한국경제 기자 binthe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