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경ESG] ESG NOW
블랙록은 ESG 대신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인프라 프로젝트에 베팅하고 있다. 사진은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 한국경제신문
블랙록은 ESG 대신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인프라 프로젝트에 베팅하고 있다. 사진은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 / 한국경제신문
5년 차에 접어든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이 변혁기를 겪고 있다. ESG를 세계적 규범으로 만든 환경(E) 부문이 각론에서 잡음을 내면서다. 세계 주요국 정부는 기후 위기 관련 입법에서 숨 고르기에 나서는 모양새다. 반면 규제당국의 좌고우면에도 아랑곳않고 탄소중립 이슈 선점을 통한 이미지 제고에 박차를 가하는 글로벌 대기업도 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최근 “각국 당국이 탄소중립 목표에서 일부 후퇴하는 기조를 보이고 있지만, 자본력으로 무장한 글로벌 대기업과 투자기관은 에너지 전환을 계속 지지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연합(EU)에서 공급망실사법(기업지속가능성실사지침, CSDDD) 법제화가 진통을 겪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독일, 이탈리아 등 주요 회원국의 이탈표로 이른바 ‘유럽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 불리는 CSDDD는 한때 좌초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논란 끝에 CSDDD는 원안보다 완화된 내용으로 4월 말 유럽의회 본회의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ESG 공시 입법 속도 늦추는 美·유럽

EU는 그간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도입 등으로 환경 이슈를 주도해왔다. CSDDD 이전에는 역내 기업에 ESG 관련 공시 의무를 부과한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이 도입되기도 했다. 하지만 기업에 공급망 전반에 걸친 ESG 의무를 부과한 CSDDD의 법제화가 당초 예상보다 지연되고 있는 것은 과도한 규제라는 반대 의견 때문이다. 세계화된 공급망이 워낙 복잡해 부품이나 원자재 하나하나의 출처를 규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라는 지적이다. 법 위반 시 기업에 부과되는 민형사상 책임도 막대하다. EU 이사회에서 법안 부결을 주도했던 독일 자유민주당은 “과도한 관료주의로 독일과 유럽이 사업장으로서 매력을 스스로 갉아먹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서는 증권거래위원회(SEC)가 당초 입법 예고한 수위에서 대폭 후퇴한 ‘기업 기후 공시 의무화 규칙’을 의결했다. 미국 상장기업들은 2026 회계연도부터 기후변화 관련 리스크가 재무제표 및 사업 전망에 미치는 영향, 온실가스배출량 등을 의무적으로 공시하라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러나 2년 전 초안과 달리 해외 법인 등 기업의 공급망 전반에서 발생하는 온실가스배출량(스코프 3)에 대한 공개 의무 조항을 삭제했다. 사업 운영 과정이나 에너지 구매 시 발생하는 배출량(스코프 1·2)에 대해서도 소규모 기업 등 면제 대상을 늘렸다. 우리나라도 2026년 도입 예정인 ESG 공시 제도에서 스코프 3 배출량 공개 의무는 일정 기간 면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최근 미국 에너지 대기업 엑손모빌이 ESG 행동주의 투자자의 주주제안에 소송으로 맞불을 놓은 것도 도마 위에 올랐다. 겁먹은 투자자들이 주주제안을 철회했지만, 엑손모빌은 법원의 판단을 끝까지 받아보겠다고 했다. 소액주주를 향한 대기업의 이례적 대응에 비판이 제기됐지만, 엑손모빌은 “그간 투자자로 가장한 기후활동가에 반복적으로 당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ESG 광풍에 시달린 기업의 반격”이라며 지지하는 여론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10조 달러 투자금을 굴리는 세계 1위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최고경영자(CEO)의 행보도 주목받고 있다. 핑크는 2020년 “ESG를 실천하는 기업 위주로 투자하겠다”고 말해 ESG 열풍을 일으킨 장본인이지만, 지난해 말 돌연 “ESG라는 용어가 정치화됐다”며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후 ‘블랙록의 변심’, ‘월가의 탈ESG’ 등이라는 보도가 쏟아졌다.

블랙록은 변하지 않았다, 현명해졌을 뿐

그러나 월스트리트저널(WSJ)은 “ESG가 ‘워크 자본주의’, ‘그린워싱’ 등 온갖 논란에 휩싸이자 피로감을 느낀 핑크가 단어 사용에 구애받지 않겠다고 선을 그은 것일 뿐 그는 여전히 친환경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했다. ESG 대신 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인프라 프로젝트에 베팅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블랙록이 올해 1월 125억 달러를 주고 인수한 글로벌 인프라스트럭처 파트너스(GIP)는 수자원, 쓰레기 처리 등 다양한 친환경 인프라 포트폴리오를 보유한 펀드 운용사다. 한 환경단체 관계자는 “에너지 전환 인프라 프로젝트는 ESG의 새로운 이름”이라고 설명했다. 블룸버그 NEF에 따르면 지난해 에너지 전환 인프라 투자 규모는 약 1조8000억 달러로, 2022년 대비 약 17% 증가했다. 블랙록의 한 임원은 “이를 ‘전환 투자(transition investing)’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래비스 캐피털의 에드 심슨 에너지 인프라 대표는 “산업계 경영진은 (경영 안정성을 위해) 길고 긴 에너지 전환 여정의 한 방향을 꾸준히 따르고 싶어 한다”며 “영국 정부가 내연기관차 판매 금지 계획을 늦췄지만, 대부분의 자동차 제조사는 오히려 정책의 비일관성을 지적하며 (정부의 후퇴와 상관없이) 전기차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기업으로서는 신제품 개발에 필요한 시간, 소비자의 친환경 수요 등을 고려할 때 꾸준히 나아가야 하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은 이미 4년째 연례보고서에 ESG 관련 사항을 밝히고 있다. “2040년까지 고객사의 탄소중립도 달성하겠다”며 스코프 3 배출량 현황을 보고한다. ASML은 지난해 공개한 2022년 보고서에서 “본사가 있는 네덜란드와 미국에서는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달성했지만, 대만과 한국에서는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밝혔다. 1년 만인 지난달에 내놓은 2023년 보고서에서는 “대만에서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하는 데 성공해 2025년에는 연간 16킬로톤의 탄소배출량 감축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주요국 정부가 전면적인 ESG 공시 도입 시점과 범위 등에 통일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글로벌 기업의 경영 안정성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공급망실사법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던 EU에서도 프랑스, 네덜란드 등 개별 회원국은 자체적인 공급망실사법을 더욱 강화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 역시 연방 기관인 SEC가 완화된 규칙을 내놨지만, 캘리포니아주 등 주정부 단위로는 스코프 3 배출량 공시의무화 법안을 도입한 상황이다. SEC의 기후 공시 제도에 자문했던 아사프 번스타인 콜로라도대 교수는 “주요 대기업의 자발적인 ESG 보고는 이미 도처에서 이뤄지고 있지만, 중구난방인 상황”이라며 “표준화만이 투자자에게 올바른 의사결정의 지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리안 한국경제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