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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기에 명품업체 줄줄이 죽 쑤는데…홀로 살아남은 프랑스의 자존심[글로벌 종목탐구]
“금보다 나은 버킨백” 전 세계인 식지 않는 사랑
7% 가격 인상에도 매출 두 자릿수 증가율 유지
“경쟁사 압도하는 존재감”…시총 2000억 클럽 진입


영국에서 태어났지만, “프랑스의 아이콘”(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으로 불리는 가수 겸 배우 제인 버킨이 지난 7월 16일 향년 76세로 눈을 감았다. 1984년 런던행 에어프랑스 비행기에서 당시 에르메스 최고경영자(CEO)였던 장 루이 뒤마의 옆자리에 앉은 버킨이 실수로 가방 속 물건들을 쏟았고, 이를 계기로 수납공간이 많은 ‘버킨백’이 탄생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버킨의 유명세를 등에 업은 버킨백은 켈리백과 함께 에르메스의 오랜 스테디셀러로 활약해 왔다. 일정 수준의 구매 실적이 있는 고객만 버킨백을 살 수 있도록 제한하는 정책을 편 덕에 버킨백의 희소가치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리셀(재판매) 시장에서의 판매가는 정가의 2배를 넘는다. 한때는 버킨백이 금보다 나은 투자처라는 얘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타임지에 따르면 버킨백이 처음 생산된 이후 30여 년 동안의 연간 수익률은 14.2%로, 미국 뉴욕증시 대표 지수인 S&P500지수(8.7%)나 금(-1.5%)보다 훨씬 높았다.
불경기에 명품업체 줄줄이 죽 쑤는데…홀로 살아남은 프랑스의 자존심[글로벌 종목탐구]
버킨 사후에도 버킨백에 대한 전 세계인들의 사랑은 이어지고 있다. 글로벌 경기 둔화의 여파로 명품업체들의 실적이 줄줄이 꺾이는 와중에도 에르메스만은 굳건했다. 이 회사의 올해 3분기 매출 증가율은 15.6%(전년 동기 대비)였다. 1분기(23%), 2분기(27.5%)와 비교하면 소폭 둔화했지만, 시장 전망치(14%)를 웃돌았다. 구찌를 소유한 케링그룹(-13%)이나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 1%) 등 경쟁사와 견줘 보면 매우 양호한 성적이었다.

시장에선 버킨백에 대한 꾸준한 수요가 에르메스의 탄탄한 실적을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 기간 미주와 유럽 지역에서의 매출 증가율은 각각 20%, 18.1%에 달했다. 미국에선 특히 지난해 10월 뉴욕 매디슨 애비뉴에 문을 연 신규 매장이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전체 매출의 48%가 나오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21%의 매출 신장률을 보이며 전 지역에서 두 자릿수의 실적 개선이 나타났다. 에릭 뒤 할고에 에르메스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컨퍼런스콜에서 “중국과 대만, 홍콩, 마카오에서의 판매가 상당히 강력했다”고 말했다.
불경기에 명품업체 줄줄이 죽 쑤는데…홀로 살아남은 프랑스의 자존심[글로벌 종목탐구]
버킨백과 켈리백 등 하이엔드 제품들을 중심으로 한 확실한 고급화 전략이 다른 명품업체들과의 차별성을 키웠다는 평가다. 영국 온라인 투자 플랫폼 인터랙티브 인베스터의 빅토리아 스칼러 투자 책임자는 “가격 인상이 수요 부담으로 이어지는 일반적인 경제 법칙이 명품 시장에선 작동하지 않는다”며 “최소 1만달러(약 1352만원)에서 시작하는 에르메스 백의 매력은 가격이 오를수록 커지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에르메스는 올해 약 7%의 가격 인상을 단행했다.

에르메스는 특히 의도적인 공급 제한을 두는 보수적 판매 전략으로 제품의 희소성을 극대화하는 데 성공했다. 지난 10년 새 매출이 두 배 이상 불어나는 동안 이 회사는 전 세계적으로 약 300개 수준인 매장 수를 늘리지 않았다. 포브스는 “에르메스 핸드백에 대한 수요는 항상 생산 능력을 초과했다”고 평했다. 스위스 금융그룹 UBS AG의 애널리스트들은 “에르메스 역시 갈수록 복잡해지는 거시 환경에 따른 소비 둔화 추세에서 자유롭진 못하지만, 이 회사의 독특한 공급 주도형 비즈니스 모델이 계속적인 초과 수익을 견인할 것으로 본다”고 내다봤다.
불경기에 명품업체 줄줄이 죽 쑤는데…홀로 살아남은 프랑스의 자존심[글로벌 종목탐구]
확고한 팬층을 확보해둔 에르메스는 불경기에 따른 타격도 크지 않았다. 씨티그룹의 토마스 쇼벳 애널리스트는 “에르메스의 고객들은 인플레이션에 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동시에 충성도가 높은 최상위(소득)층”이라며 “에르메스는 동종업계 대비 관광 수요에 대한 익스포저(노출도)가 비교적 낮은데, 이는 (유럽으로의) 중국 관광객 유입이 예상보다 더디게 회복되고 있는 데 따른 타격이 적은 이유”라고 분석했다. 미국 투자은행(IB) 번스타인의 루카 솔카 애널리스트 역시 “에르메스는 글로벌 명품 산업 전체를 완전히 압도하고 있다”며 “이 브랜드가 가진 힘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긴 대기 명단은 단기적 수요 둔화를 상쇄하기에도 충분하다”고 짚었다.

향후 실적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하다. 악셀 뒤마 에르메스 최고경영자(CEO)는 “3분기의 견조한 실적은 우리의 컬렉션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며 “올해 남은 기간 아시아와 미주 지역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모멘텀이 유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불경기에 명품업체 줄줄이 죽 쑤는데…홀로 살아남은 프랑스의 자존심[글로벌 종목탐구]
국제 통계 사이트 스타티스타에 따르면 올해 2월 기준 에르메스는 유럽 증시에 상장된 기업 중 규모가 7번째로 크다. 시가총액이 1811억유로 수준이었을 때 얘기다. LVMH에 이어 글로벌 명품 기업 중에서는 2위를 달리고 있다. 연초 주가가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면서 4월에는 ‘시총 2000억유로 클럽’에 진입하기도 했다. 에르메스 주가는 지난 5월 22일 2022.5유로로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

현재 시총은 1861억유로(약 267조원) 수준이다. 최근 1년 새 주가 상승률은 34%를 넘는다. 투자은행 바클레이즈는 3분기 실적 발표 직후 이 회사 목표주가를 기존 2077유로에서 2090유로로 올려잡았다. UBS도 2030유로에서 2046유로로 목표주가를 상향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