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는 원래 유니콘 기업(시가총액 10억달러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이 138개 있어야 한다."

최근 세계은행이 국내총생산(GDP)과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바탕으로 추산한 일본의 '적정 유니콘 기업' 숫자다. 시장 조사회사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올 2월 현재 일본의 유니콘 기업은 6개로 세계은행의 추산치와 23배 차이가 난다.

국가별로는 미국이 520개로 1위, 중국과 인도가 167개와 62개로 2~3위다. 한국은 12개로 10위다. 시장이 효율적으로 작동했다면 일본의 유니콘 수는 인도를 멀찌감치 밀어내고 3위여야 하지만 현실은 경제규모가 3분의 1인 한국의 절반 수준이다.

◆투자규모 '日 8조 vs 美 410조'

지난해 일본의 스타트업 투자규모는 7801억엔(약 7조7189억원)으로 2019년보다 41% 늘었다. 하지만 미국의 2021년 투자액은 3340억달러(약 410조원)로 일본과 차원이 달랐다. 투자규모가 2019년 이후 2년 만에 2.2배 늘었다.

중국과 인도, 유럽 주요국 역시 투자규모와 증가율이 일본을 크게 웃돌아 경쟁국과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보다 못해 일본 최대 경제단체인 게이단렌이 직접 나섰다. 지난달 11일 게이단렌은 5년 후인 2027년까지 일본의 유니콘 기업을 현재의 10배 이상인 100개로 늘리기 위한 '스타트업 약진 비전'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

법인설립 절차 간소화와 대기업에 의한 스타트업 인수·합병(M&A) 장려, 해외인재 유치 등 38가지 항목에 걸쳐 일본의 유니콘을 늘리기 위한 방안을 제안했다.

게이단렌의 제안에는 한국을 모범사례로 든 항목도 눈에 띈다. 13번째 항목인 '글로벌 진출 지원'에서는 "한국은 국가의 톱(대통령)이 직접 '글로벌 4대 벤처 강국'을 목표로 내세우고 전면 지원을 표명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코트라(KOTRA)를 중심으로 스타트업의 해외진출을 지원한다"는 대목도 있다.

이와 관련 게이단렌은 '스타트업청'과 같이 관련 정책을 일원화해서 추진할 수 있는 사령탑을 정부 조직의 하나로 신설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한국은 중소벤처기업부가 스타트업 정책을 추진하고, 한국성장금융투자운용이 성장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스타트업의 M&A를 지원해야 한다는 제안은 "일본의 벤처캐피털과 스타트업은 조금 커졌다 싶으면 유니콘 기업을 꿈꾸기 보다 상장(IPO)을 해서 투자금을 회수하는데 치중한다"는 지적을 반영했다.

2019년 기준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의 68%가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엑시트)했다. 투자회사를 매각해서 투자금을 회수한 비율은 32%였다. 반면 미국은 투자금 회수의 91%가 M&A를 통해 이뤄진다.

◆'대기업 클럽' 게이단렌이 왜?

일본 대기업들의 대표 단체인 게이단렌이 스타트업 지원 방안을 정부에 건의하는 것은 의외로 비쳐진다. 남바 도모코 게이단렌 부회장(DeNA 회장)은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고도 성장기에 탄생한 기업을 넘어서는 차세대 기업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GAFAM(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마이크로소프트)과 같이 인류의 일상을 바꿔놓은 미국의 정보기술(IT) 대기업은 모두 벤처캐피털의 자금 지원을 받아 성장한 스타트업 출신이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기업이 나오지 않는다는게 게이단렌의 지적이다.
게이단렌의 정부 제안서 일부. (그래프 왼쪽) 2019년 기준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의 68%가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엑시트)했다. 투자회사를 매각해서 투자금을 회수한 비율은 32%였다. (그래프 오른쪽) 반면 미국은 투자금 회수의 91%가 M&A를 통해 이뤄진다.
게이단렌의 정부 제안서 일부. (그래프 왼쪽) 2019년 기준 일본 스타트업에 투자한 벤처캐피털의 68%가 IPO를 통해 투자금을 회수(엑시트)했다. 투자회사를 매각해서 투자금을 회수한 비율은 32%였다. (그래프 오른쪽) 반면 미국은 투자금 회수의 91%가 M&A를 통해 이뤄진다.
미국에서 스타트업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미국 상장사수의 50%가 스타트업 출신 기업이다. 스타트업 출신 기업들의 시가총액과 연구개발비(R&D)가 전체의 75%와 92%에 달한다.

현재 글로벌 시가총액 10대 기업 가운데 애플 등 8개가 스타트업으로 출발한 기업이다. 예외는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와 워런 버핏의 벅셔해서웨이 2개 뿐이다. 반면 일본은 도요타, 소니 등 10대 기업 모두가 스타트업과 거리가 먼 제조업과 인프라 기업이다.

게이단렌은 '일본 대기업의 클럽'이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스타트업도 가입할 수 있다. 2018년 11월 나카니시 히로아키 전 게이단렌 회장은 '순자산 10억엔 이상'이던 입회 자격을 '순자산 1억엔 이상'으로 완화했다. 흑자 기업이 아니더라도 게이단렌 회원이 될 수 있도록 해 스타트업이 쉽게 진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현재 30개 이상의 스타트업이 게이단렌 회원사로 활동하고 있다.

게이단렌의 제안에 일본 정부도 움직이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2022년을 "스타트업 창출 원년"으로 명명했다. 오는 6월 스타트업 지원 5개년 계획을 발표할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고 위안 삼을 때가 아니라고 지적한다. 글로벌 유니콘들은 멀찍이 앞서가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상반기 세계에서 291개 유니콘이 탄생하는 동안 한국의 유니콘은 1개 늘었다. 한국과 투자규모가 비슷한 이스라엘의 유니콘 숫자는 20개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