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계절이 무르익으면서 이념논쟁이 달아오르고 있다. 이념은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하기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에서의 이념논쟁을 보면 시계추가 거꾸로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역사적 실험이 끝나 무대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린 낡은 이념이 다시 살아나 우리 사회를 뒤덮을 것 같은 우려마저 든다. 우리의 경제이념은 자유시장경제체제다. 개인과 공동체간의 관계,재산권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재화와 서비스생산을 통제하는 적절한 수단,국가의 역할을 정의하는 것이 경제이념이다. 개별 경제주체가 시장의 구성원이고,이의 집합체가 공동체가 되는 개념이며,전체주의 형태의 공동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인의 행동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사적재산권은 신성한 권리이며,개방된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소비자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생산이 이뤄진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것은 정부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역할이 작다는,즉 시장개입이 최소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적으로 한 나라의 운영에 있어서 공동체적 요소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주의에서는 '기회의 공평'보다 '결과의 동등'을 추구하게 돼 하향평준화로 귀결되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사회일수록 정부 규제가 강화되고,복지국가를 지향한다는 목표아래 큰 정부를 갖게 되며,정부와 재계간의 관계는 긴밀해지는 등 결과는 더 균등하지 않게 되는 아이러니를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무한경쟁의 글로벌 경제체제에서는 선·후진국을 막론하고 경쟁의 피해계층이 생기게 마련이기에 경제주체간 긴장감이 조성된다.특히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생산자 집단이 피해를 입게 되면 한시적으로나마 국내산업 보호정책을 취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지게 된다. 자유무역체제가 장기적으로 이득이 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으면서도,단기적으로 이에 역행하는 보호정책을 취하게 되는 불상사도 나타나게 된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어서,자국산업 보호를 위한 철강수입제한 조치가 대표적 사례다. 강자이며 부자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여유를 누릴지 모르겠으나,결과적으로 국가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한편 공동체주의가 강한 사회에서는 국수주의적 보호주의 정책이 전반적으로 확산돼 경제가 내부지향적 폐쇄적으로 흐를 위험이 강하게 된다. 자유시장경제와 상치되는 이념논쟁이 제기되는 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빈부격차를 해소함으로써 누구나 잘 사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취지에 반론을 제기하긴 어렵다. 그러나 소득재분배정책을 강화해 유효수요를 증대시키는 정책으로 안정성장을 지속하겠다는 발상은 과거 여러 남미국가에서 추진하다 실패한 정책이란 점에서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는지 밝혀야 한다. 이러한 정책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수단으로 시도됐다. 우선 정부의 복지지출을 늘리고 동시에 근로자의 실질임금을 높이는 정책을 취하게 된다. 단기간에는 소비지출 증대로 경기가 살아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소비증가에 상응하도록 생산이 조속히 증대되지 못하게 되기에 인플레 압력에 직면하게 된다. 또 개방경제 상황에서는 수입이 늘어 무역적자가 늘게 마련이다. 한편 외환보유고 제약 때문에 수입을 늘리기 어렵게 돼 인플레는 가속화하게 된다. 이럴 때 국수주의적 정치지도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게 된다. 불행하게도 이 와중에 실질소득을 보상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압력 때문에 실질임금은 또 한번 상승하게 되는 등 악순환이 반복된다. 결국 IMF관리체제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는 데,정책의 대상이었던 저소득 계층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된다는 것이 남미국가들의 경험이다. 현실적 정책프로그램 제시 없는 감상주의적 사고방식에 의거한 이념논쟁은 국가발전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글로벌추세를 대처하는 데에도 경제주체간 갈등이 따르게 마련인데, 낡은 이념에 근거한 정책을 실험하게 되면 경제혼란이 가중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이념이란 국가경쟁력을 제고시키는 방안 이외에는 있을 수 없다. chskim@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