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독일 자이스의 힘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이 항복하기 전 미국과 소련이 치열하게 전개한 비공식 작전이 있다. 독일 과학자 빼 가기다. 미국은 1945년 4월 독일 예나로 몰래 진입해 어떤 기업의 막대한 특허와 설계 문서를 입수했다. 독일 분할 통치를 골자로 한 얄타 협정에 따라 같은 해 7월 예나가 소련군 주둔지로 편입되기 전 선수를 친 것이다. 미국은 이 기업에서 일하던 120여 명의 엔지니어, 숙련된 장인 등을 자국 점령지인 슈투트가르트 하이덴하임으로 이송했다. 광학 기술 세계 1위 기업 자이스(ZEISS) 얘기다.

반도체 회로를 새기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는 ‘두 개의 심장’으로 돼 있다. EUV를 내뿜는 조명광학계와 EUV 경로를 만드는 투영광학계다. 이 두 광학계 부품 수는 3만5000여 개에 달한다. 자이스는 EUV 노광장비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해 네덜란드 ASML에 공급한다. ASML은 여기에 자신의 기술력을 더해 삼성전자, TSMC 등에 판매한다. 자이스가 반도체 시장 가치사슬의 원류란 얘기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26일 독일 자이스 본사를 방문한 이유다.

자이스는 1846년 설립됐다. 1816년부터 현미경 공방을 운영하던 카를 자이스와 수학자인 에른스트 아베 예나대 교수가 의기투합해 기업을 세우고 키웠다. 자이스가 ‘수학적 확실성’으로 현미경 성능을 최고로 발전시킬 수 있는 전문가를 백방으로 찾다가 서로 연이 닿았다고 한다. 아베는 1869년 광학현미경의 원리가 되는 수학 공식을 세계에서 처음 고안했다. 공식 내용은 ‘빔의 파장이 작아져 집광력이 높아지면 렌즈 해상도가 올라간다’이다. 스마트폰 내 반도체 회로 선폭이 나노미터(㎚)까지 갈 수 있었던 기술의 출발점이 바로 이 공식이다.

자이스는 주 정부가 소유하는 공익재단 산하 유한회사다. 정관에 주식 전체를 재단에 귀속하고 외부인과 거래하지 못 하게 해 놨다. 이 원칙은 창립 이후 변함이 없다. 미국이 전쟁 통에서도 탐내던 200년 기업의 뚝심이다. 이 뚝심이 삼성전자가 가장 절실히 원하는 장비에 심장을 단 원동력이 됐을 터다.

이해성 테크&사이언스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