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편집장 레터

정보 공시에서 공급망 실사까지 올 한 해 ESG와 관련한 규제 물결이 거세게 몰아쳤습니다. 가장 먼저 현실로 다가온 것은 지난 10월에 시행된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입니다. 2026년까지 이행 기간이 주어졌고, 철강·비료·시멘트 등 6개 품목만 대상이라 아직은 직접적 영향을 받는 우리 기업이 많지 않지만 CBAM 시행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습니다.

CBAM은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윌리엄 노드하우스 예일대 석좌교수가 2015년 논문에서 제안한 제도에 기초합니다. CBAM은 탄소배출에 비용을 부과하는 탄소가격제(carbon pricing)를 전제합니다. 지구온난화를 막으려면 기업이 가능한 한 빨리 화석연료 사용을 중단하는 행동 변화가 필수입니다. 이러한 극적인 변화는 당위만으로는 실행되지 않습니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통해 보조금을 인센티브로 제공합니다. 하지만 이는 천문학적 재정 투입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때문에 경제학자들은 탄소가격제를 도입해 탄소 고배출형 제품의 가격이 올라 기업들이 탄소 저배출형 제품으로 전환하도록 만드는 방식을 지지합니다. 실제로 유럽을 필두로 미국을 제외한 대다수 국가가 이미 배출권거래제 또는 탄소세 형태로 탄소가격제를 도입했거나 검토 중입니다. CBAM은 탄소가격제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배출 감축이 불충분한 수입품에 비용을 부과해 탄소가격제를 시행하지 않거나 탄소가격이 낮은 국가의 ‘무임승차’를 막기 때문입니다. 노드하우스 교수가 쓴 논문 제목도 ‘기후클럽: 국제기후정책에서 무임승차의 극복’입니다. CBAM은 유럽연합(EU)이 갑자기 만들어낸 제도거나 조만간 사라질 제도가 아닙니다. CBAM 도입 국가와 적용 품목은 계속 늘어난다고 봐야 합니다. 이미 영국과 호주가 도입을 검토 중입니다. 향후 자동차 등 우리 주력 수출품으로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 그 영향은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배출권거래제를 가장 앞서 도입한 국가에 속합니다. 하지만 현재 배출권 가격이 너무 낮게 설정돼 녹색 전환을 촉진하는 인센티브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배출권거래제의 근본적 개선에 나서야 합니다. 또 CBAM 시행으로 기업은 제품 단위 배출량 측정과 관리가 중요해졌습니다. 기존 기업 단위 관리보다 훨씬 세밀한 계측이 요구됩니다. 측정 기준 정비, 체계 구축 등 정부 지원이 필요합니다.

탄소가격제에서 진짜 문제는 녹색 전환을 위한 대체 기술이 없는 산업입니다. 대안이 없는 기업에 탄소비용만 부과되면 해외 이전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 기술 개발을 위한 정책 지원과 투자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일관된 정책 시그널입니다. 전환 기술은 대부분 장기적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한 전문가는 탄소가격제를 ‘탄소본위제’로 표현합니다. 탄소본위제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편집장 레터] 탄소본위제 시대의 생존 전략
장승규 〈한경ESG〉 편집장 sk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