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을 낳은 무화과나무 [고두현의 문화살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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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가 사랑한 '신의 과일' 무화과
방탕했던 젊은날 통한의 참회
뼈아픈 자기성찰로 '敎父' 등극
무화과꽃은 열매 속에 숨어있어
잎은 아담과 이브 최초의 옷감
고두현 시인
방탕했던 젊은날 통한의 참회
뼈아픈 자기성찰로 '敎父' 등극
무화과꽃은 열매 속에 숨어있어
잎은 아담과 이브 최초의 옷감
고두현 시인
‘내 고장 팔월은 무화과(無花果)가 익어가는 시절….’ 이육사 시 ‘청포도’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을 살짝 바꾼 패러디다. 내 고향 남해를 비롯한 남부지역에선 이맘때부터 무화과가 본격적으로 익는다. 무화과는 ‘꽃이 없는 과일’이라 해서 은화과(隱花果)라고도 불리지만, 사실은 열매 속의 붉은 부분이 모두 꽃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식사 후 반드시 무화과를 먹었다고 한다. 당도가 높아 소화에 도움이 되는 디저트라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했던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로마 정치인 카토가 무화과 재배법을 저술할 정도였다. 카토가 3차 포에니전쟁 때 카르타고를 멸해야 한다며 무화과를 높이 들고 “그곳에 가면 무화과가 무진장 있다”고 선동한 일화도 유명하다.
철학사적인 면에서도 의미가 특별하다. 무화과나무는 육체적 방탕이나 정신적 방황을 딛고 새 영혼으로 거듭나도록 우리를 돕는 ‘성찰의 나무’다. 대표적 사례가 기독교 초대 교회 교부(敎父)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回心)이다.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을 거닐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지난 시절의 방종을 한탄하며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한참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데 어디선가 “들고 읽어라” 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들렸다. 방으로 달려간 그는 성경을 펼쳤다. 로마서 13장이 눈에 들어왔다. “흥청대는 술잔치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다툼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언제나 대낮처럼 단정하라. …욕망을 채우려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말라.” 그 순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난날의 쓰디쓴 경험 위에서 뼈아픈 자기반성과 깨우침을 얻은 그는 32세에 세례를 받고, 이후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불멸의 고전 <고백록>을 썼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죄’에 관한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자신의 방황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지만 다른 요소도 있었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안정적인 동로마제국과 달리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영원할 것만 같은 대제국은 균열과 파열음으로 삐걱댔고 이민족의 침략으로 옛 명성에도 금이 갔다. 사람들은 ‘인간 문명’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세상이 엉망인 이유를 ‘죄’의 개념으로 논증했고, 그 결과 ‘교회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됐다. 나아가 서유럽인의 세계관을 바꾼 주역이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순정한 고백과 깊은 울림을 주는 자기성찰의 참모습을 보여줬다. “나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여태까지 내 등 뒤에 놓아뒀던 나를 당신은 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요즘처럼 세상이 험할수록 성찰과 각성이 절실하다. 1600여 년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처럼 방종과 분쟁과 시기와 탐욕으로 찌든 세상에 회심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의 고백과 성찰 위에 나의 반성을 담아 쓴 시 한 편을 공유한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회심-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고두현)이라는 시다.
이 시는 “저를 좀 바꿔 주십시오./ 지금은 말고 조금 있다가요./ 그때 내 나이 스물하고 둘이었어라”로 시작해서 “비로소 말문 트이고 귀 열리던 그날/ 내 나이 서른하고 둘이어라. 서른하고 둘이어라”로 끝맺는다. (전문은 소박스)
마침 무화과가 익어가는 계절, 남쪽 여행길에 달콤한 ‘신의 과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워낙 맛이 좋아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여서 ‘무아과(無我果)’라 불러도 될 만하다. 무화과는 농약을 치지 않고 기르기에 물로 헹궈 껍질째 먹어도 된다. 맛 좋고 뜻깊은 ‘성찰의 나무’ 아래 앉아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을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식사 후 반드시 무화과를 먹었다고 한다. 당도가 높아 소화에 도움이 되는 디저트라 여겼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했던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로마 정치인 카토가 무화과 재배법을 저술할 정도였다. 카토가 3차 포에니전쟁 때 카르타고를 멸해야 한다며 무화과를 높이 들고 “그곳에 가면 무화과가 무진장 있다”고 선동한 일화도 유명하다.
"육신의 욕망을 도모하지 말라"
무화과 잎은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움을 느껴 몸을 가린 ‘최초의 옷’이다. 화가들도 나체의 국부를 그리기 곤란할 때 무화과 잎으로 덮곤 했다. 그래서 무화과 잎(fig leaf)이란 단어에는 가리개라는 뜻이 담겨 있다.철학사적인 면에서도 의미가 특별하다. 무화과나무는 육체적 방탕이나 정신적 방황을 딛고 새 영혼으로 거듭나도록 우리를 돕는 ‘성찰의 나무’다. 대표적 사례가 기독교 초대 교회 교부(敎父)인 아우구스티누스의 회심(回心)이다. 그는 밀라노의 한 정원을 거닐다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지난 시절의 방종을 한탄하며 자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한참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데 어디선가 “들고 읽어라” 하는 아이들의 노래가 들렸다. 방으로 달려간 그는 성경을 펼쳤다. 로마서 13장이 눈에 들어왔다. “흥청대는 술잔치나 음행과 방종에 빠지거나 다툼과 시기를 일삼지 말고 언제나 대낮처럼 단정하라. …욕망을 채우려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말라.” 그 순간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난날의 쓰디쓴 경험 위에서 뼈아픈 자기반성과 깨우침을 얻은 그는 32세에 세례를 받고, 이후 신학과 철학을 아우르는 불멸의 고전 <고백록>을 썼다. 학자들에 따르면 그가 ‘죄’에 관한 신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자신의 방황에 일차적인 이유가 있지만 다른 요소도 있었다.
당시 서로마제국은 안정적인 동로마제국과 달리 바람 앞의 등불 신세였다. 영원할 것만 같은 대제국은 균열과 파열음으로 삐걱댔고 이민족의 침략으로 옛 명성에도 금이 갔다. 사람들은 ‘인간 문명’의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그는 세상이 엉망인 이유를 ‘죄’의 개념으로 논증했고, 그 결과 ‘교회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됐다. 나아가 서유럽인의 세계관을 바꾼 주역이 됐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 앞에 선 한 인간의 순정한 고백과 깊은 울림을 주는 자기성찰의 참모습을 보여줬다. “나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여태까지 내 등 뒤에 놓아뒀던 나를 당신은 내 앞에 갖다 놓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보기 흉하고, 비뚤어지고, 더럽고, 얽었고, 종기투성이인지 보게 하셨습니다.”
유럽인 세계관 바꾼 '성찰의 나무'
이처럼 자기 자신을 대상화해서 마주볼 수 있는 관점의 변화가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도 젊은 날에는 자신을 살피기 싫어서 등 뒤에 놓아뒀노라며 반성을 회피하려 애썼다. 기도 중에도 “나를 바꿔주세요. 그러나 지금 당장은 말고요”라며 약한 모습을 드러냈다. 부끄러움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당하게 자신의 치부를 대면했을 때 비로소 신세계의 문을 열 수 있었다.요즘처럼 세상이 험할수록 성찰과 각성이 절실하다. 1600여 년 전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처럼 방종과 분쟁과 시기와 탐욕으로 찌든 세상에 회심의 은혜가 임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의 고백과 성찰 위에 나의 반성을 담아 쓴 시 한 편을 공유한다. ‘무화과나무 아래의 회심-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고두현)이라는 시다.
이 시는 “저를 좀 바꿔 주십시오./ 지금은 말고 조금 있다가요./ 그때 내 나이 스물하고 둘이었어라”로 시작해서 “비로소 말문 트이고 귀 열리던 그날/ 내 나이 서른하고 둘이어라. 서른하고 둘이어라”로 끝맺는다. (전문은 소박스)
마침 무화과가 익어가는 계절, 남쪽 여행길에 달콤한 ‘신의 과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워낙 맛이 좋아 무아지경에 빠질 정도여서 ‘무아과(無我果)’라 불러도 될 만하다. 무화과는 농약을 치지 않고 기르기에 물로 헹궈 껍질째 먹어도 된다. 맛 좋고 뜻깊은 ‘성찰의 나무’ 아래 앉아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을 음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다.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라지만,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