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겨울 폭풍과 고립의 공포
1990년 겨울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유학 중이던 A교수는 가족과 함께 웨스트버지니아주에 있는 스키장을 찾았다. 워싱턴DC에서 공부하던 지인 가족과 스키장에서 만나기로 한 것. 그는 산세가 험한 웨스트버지니아라고 해도 스키리조트를 가는 길은 안전할 줄 알았다. 그러나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낡은 세단 차량은 경사길을 제대로 올라가지 못했다. 전진도 후진도 어려웠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다. 자동차 연료와 배터리를 걱정하는 순간, 그는 ‘조난’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먼저 도착한 지인의 SUV 차량이 자신을 찾으러 와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광활한 미국 대륙에선 잠깐의 눈보라도 순식간에 생명을 위협한다. 케이블TV에서 온종일 날씨 예보를 하고,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스톰(storm)’이라며 미국인들이 호들갑을 떠는 이유다. 태풍을 겪어본 한국 사람들도 거대한 고목과 전신주가 도로를 가로질러 쓰러지고 길가 목조주택이 파괴된 장면을 보면 입을 다물 수 없다.

스톰은 허리케인부터 토네이도(회오리돌풍), 더스트스톰(모래폭풍), 스노스톰(눈폭풍)까지 다양하다. 45년 만의 최악이라는 이번 미국 겨울 폭풍은 강풍에 폭설, 체감 영하 50도까지 떨어진 혹한이 겹친 블리자드(blizzard)급이다. 그 위력은 2004년 개봉한 영화 ‘투모로우’를 연상시켰다. 원인부터가 그랬다. 영화는 기후 변화로 남극과 북극의 빙하가 녹아 바닷물 수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전 세계에 빙하시대가 닥친다는 설정이었다. 현실에선 북극의 영하 50~60도 한랭기류가 남하하면서 ‘폭탄 사이클론’이란 저기압 폭풍을 만든 게 기폭제가 됐다.

이번 폭풍으로 뉴욕주 나이아가라 폭포 인근 버펄로에서만 27명이 죽는 등 미국 전역에서 최소 57명이 숨진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최고 2m까지 쌓인 눈에 갇혀 사망자가 속출했다. 이들을 가장 공포에 떨게 한 것은 눈보라 자체보다 고립감과 무력감이었을 것이다. 타인의 도움이 없으면 극한 상황에서 벗어날 길도 없다. 버펄로 여행길에 고립됐다가 한 주민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한국인 관광객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대자연은 아름답고도 두렵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