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러시아 원유 수입 금지 제재안을 대폭 완화했다. EU 회원국 대다수가 올겨울 에너지 대란을 맞을 가능성이 큰 가운데 원유 공급 부족으로 기름값마저 폭등하는 상황을 우려해서다. EU가 적극 추진했던 러시아 원유 금수 조치가 사실상 ‘껍데기’만 남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EU 의회가 최근 러시아산 원유를 선적하는 선박에 대한 해상보험 제재안을 일부 수정했다고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러시아 원유를 제3지역으로 운송하는 선박에는 해상보험 서비스 제공을 허용하는 게 핵심이다. 일례로 EU 회원국의 선박이 러시아 원유를 EU 외 다른 국가로 운송할 때는 해상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

EU의 원안은 러시아 원유를 실은 선박은 목적지가 어디든 상관없이 신규 해상보험에 가입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국제해사법상 해상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선박은 화물을 운송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원안은 러시아 원유를 겨냥한 가장 포괄적인 제재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영국이 예상보다 소극적인 제재안을 통과시킨 게 복병이 됐다. 세계 최대 해상보험사인 로이드 등을 보유한 영국은 해상보험산업의 중추로 꼽힌다. 해상보험 가입 금지를 통한 러시아 원유 제재가 제대로 효과를 내려면 영국의 협조가 필수적인 이유다. 7월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제재안은 러시아산 원유를 영국으로 실어나르는 선박에만 보험 계약을 금지시키는 내용이었다. 시행 시기도 내년으로 미뤘다. 영국의 ‘후퇴’를 지켜본 EU도 덩달아 해상보험 제재를 축소했다는 해석이다.

로리드스미스로펌 소속 한 변호사는 “EU의 제재안 수정은 엄청난 후퇴”라며 “법조계에서는 영국이 좀 더 공격적인 제재를 할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글로벌 로펌 HFW의 사라 헌트 변호사도 “EU 수정안은 유럽 선박의 러시아산 원유 선적을 사실상 허용한 것”이라며 “놀라운 결정”이라고 평가했다.

올겨울 에너지 대란에 대비하고 있는 유럽 국가들이 국제 유가 상승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된다. 러시아가 최근 천연가스 공급을 줄이면서 유럽 기업과 가계가 전력난으로 고통받는 가운데, 유가 상승까지 겹치면 더 큰 피해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FT는 “미국이 주장하고 있는 러시아산 원유 가격상한제에 힘이 실릴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가격상한제는 국제 원유 시장에서 러시아산 원유에 대해 일정 가격 이상으로 입찰하지 않기로 원유 소비국들이 약속하는 방안을 말한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