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와 법②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SG(환경·사회·지배구조) 논의는 2004년 UN 글로벌 콤팩트의 ‘후 케어스 윈(Who Cares Wins)’ 이니셔티브와 2006년 UN 책임투자원칙(UN PRI)을 그 출발점으로 본다. 하지만 최근의 ESG 열풍은 2019년 미국 주요 기업 CEO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이 ‘회사의 목적에 관한 성명서(Statement on the Purpose of a Corporation)’를 발표하면서 촉발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성명서에서 BRT는 고객에 대한 가치 제공, 근로자에 대한 투자와 공정한 보상, 하청업체에 대한 공정하고 윤리적인 대우, 지역사회 지원 및 환경보호, 주주에 대한 장기적 가치 제공을 약속하면서 회사가 다양한 이해관계자에게 기여할 것을 선언했다.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블랙록, AT&T, 코카콜라, 브리티시패트롤리엄(BP), 포드, 월트디즈니 등 미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기업의 CEO 181명이 이 선언에 참여해 미국 내 큰 관심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2019년 BRT 성명서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20여 년 전만 해도 이들이 완전히 상반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1997년 BRT는 또 다른 성명서에서 회사는 주주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따라서 회사가 주주의 이익과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함께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고 선언한 바 있다. 이러한 점에서 2019년 BRT 성명서는 미국 주요 기업 CEO들이 회사가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주주 우선주의를 포기하고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함께 추구해야 한다는 이해관계자주의를 택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회사의 목적은 무엇인가? 회사는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는가? 1997년 BRT 성명서처럼 회사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해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할까? 아니면 2019년 BRT 성명서처럼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추구해야 할까? 주주 우선주의와 이해관계자주의 간 논쟁은 사실 100년을 넘은 회사법의 가장 오래된 숙제 중 하나다.

주주 대 이해관계자

19세기 초만 해도 회사는 일정한 목적이 있는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아 설립할 수 있었고, 따라서 해당 목적을 위해서만 운영할 수 있었다. 그러다 일정한 형식적 요건만 갖추면 누구나 회사를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게 되면서 회사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고, 1930년대에는 컬럼비아 로스쿨의 아널드 벌리 교수와 하버드 로스쿨의 메릭 도드 교수가 양측 입장을 대변하면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주주 우선주의를 지지한 포드사 판결이 1919년에 선고되기도 했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개념도 1950년대에 이미 등장하는 등 이해관계자주의도 미국 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1970년대 들어 주주 우선주의가 점점 지배적 견해로 자리를 잡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 교수는 유명한 1970년 뉴욕타임즈 칼럼을 통해 경영자는 주주의 대리인으로서 자신을 선출한 주주의 이익을 위해 업무를 수행해야 하고, 따라서 경영자가 회사 재산을 주주 의사와 무관하게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미국에서 적대적 M&A가 활발히 이뤄지고, 1990년대 스톡옵션 제도가 널리 도입되면서 주주 우선주의는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주가가 낮아지면 적은 자금으로도 기업의 경영권을 인수할 수 있으므로 적대적 M&A에 취약해지고, 주가가 높아지면 스톡옵션에 따라 경영진이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회사 경영진이 주가 관리를 최우선 과제로 두고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경영 역량을 집중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20세기 말에는 세계화 흐름과 함께 주주 우선주의가 전 세계적으로 지배적 입장에 놓인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기후변화로 부각된 이해관계자주의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세계 금융위기와 유로존 재정위기를 거치고 기후변화 문제가 부각되면서 이해관계자주의가 다시 주목받는다. 주주의 이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회사가 사업 리스크나 온실가스 같은 비용을 사회에 전가하게 되고, 그 결과 금융위기나 기후변화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은 2006년 회사법을 통해 이사가 의사결정 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할 것을 요구했고, 프랑스는 2019년 마크롱 대통령의 주도 아래 회사 정관에 회사 존재 이유(레종 데트르, raison d’être)를 기재하고, 회사가 의사결정을 하는 데 사회·환경적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팍트법(Loi Pacte)을 제정했다. 지난 미국 대선 과정에서도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같은 유력 정치인이 근로자의 이사회 참여나 이해관계자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정책을 펼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 법은 어떠한 입장일까? 상법과 판례 내용을 종합해보면 이사는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할 의무를 부담하고, 회사의 이익은 주주나 이해관계자의 이익과 구분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회사가 주주나 다른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위해 회사 재산을 사용하는 것은 이익배당처럼 법에서 허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엄격히 제한된다.

그런데 회사가 회사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주주나 이해관계자 보호 측면에서 오히려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회사가 이익 극대화라는 목표 아래 재산 유출을 최소화하면 결국 회사 재산은 경영진, 나아가 지배주주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경영진이나 지배주주로서는 전체 주주에 대한 배당을 실시하거나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위해 재산을 사용하는 대신, 자신의 사적 이익을 추구할 유인을 갖게 될 수 있다. 결국 현재의 태도는 회사 재산이 주주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도,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위해서도 사용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우려가 있다.

영국이나 프랑스가 법 개정을 통해 회사가 주주의 이익과 함께 환경이나 사회문제,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한 것도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도 회사가 회사의 이익을 추구해야 한다는 현재의 다소 형식적 입장 대신, 누구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