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으로 황폐해진 한국을 재건한 마지막 기업가 세대가 갔다.” 롯데그룹 창업자인 신격호 명예회장이 타계하자 블룸버그통신은 이렇게 전했다. 신 명예회장은 이병철 정주영 회장 등과 함께 한국 경제의 창업 1세대를 이끈 마지막 생존자였다.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했던 거인들의 퇴장은 그들이 남긴 기업가 정신을 어떻게 계승할지 우리 앞에 큰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과거 한국의 고도성장은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는 독특한 기업가 정신을 빼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경제학 교과서의 ‘비교우위론’을 그대로 따랐다면 한강의 기적은 없었을 것이란 점은 경제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다. 신 명예회장은 1세대 창업자들의 공통점인 기업보국의 대표적 실천자였다. 일본에서 사업을 일으킨 신 명예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고, 이후 유통 호텔 석유화학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매출 100조원 규모의 그룹을 일궜다. “백화점은 한 나라의 경제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한국을 대표할 롯데백화점은 한국의 위상을 재는 바로미터다.” 신 명예회장의 이런 철학은 다른 사업에도 그대로 녹아 있다.

신 명예회장은 기업인들에게 귀감이 될 경영원칙도 남겼다. ‘품질 경영’이란 말조차 없었던 시기에 품질을 고집했다. ‘무차입 경영’ 중시는 이후 롯데가 외환위기의 터널을 빠져나와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독자 브랜드 개발’은 호텔을 비롯해 ‘롯데’ 브랜드에 기반한 사업 확장으로 이어졌다. 그의 경영원칙 세 가지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업에는 손대지 않고, 이해가 되는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철저히 조사하고 준비한다. 사업에 실패해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자금을 차입한다.” 이 원칙들에서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이 느껴진다. 잘 모르는 사업으로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기 책임으로 사업을 하겠다는 ‘책임 경영’이다.

이제 이 시대 기업인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창업 1세대의 철학을 토대로 새로운 경쟁 환경에서 생존하고 성장할 기업가 정신을 다시 창출하는 것이다. 경제성장과 기업가 정신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한 국가가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어 선진국으로 안착하려면 창업과 스타트업을 활성화하고 성장의 원천도 지식과 아이디어 등으로 옮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불행히도 인공지능(AI) 등 4차 산업혁명 대응이 시급한 상황에서 한국의 기업가 정신은 사상 최저로 떨어졌다는 조사가 나오고 있다.

이대로 가면 혁신성장은 공염불로 끝날 수밖에 없다. 글로벌 경제가 불확실하고 규제 등으로 국내 기업환경이 어렵다는 점을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창업 2·3세대와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한국 경제를 재건한 창업 1세대의 기업가 정신을 토대로 다시 혁신으로 무장하는 것 말고는 헤쳐나갈 다른 방도가 없다. 정부 또한 과거 척박한 상황에서도 기업인들이 맘껏 뛸 수 있게 해 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면 기업하기 좋은 환경 조성에 팔을 걷어붙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