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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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해 비메모리 반도체(시스템 반도체) 전문 인력을 키우려던 정부와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구상이 사실상 무산됐다. “서울대가 특정 기업을 위한 인력 양성소냐”는 서울대 교수들의 불만이 집중적으로 제기된 탓이다.

차국헌 서울대 공대학장은 지난 25일 한국경제신문 기자와 만나 “학부에 반도체 계약학과를 신설하려면 전체 단과대 학장들이 참여하는 대학본부 학사위원회에서 학칙개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데, 의사타진 결과 통과 가능성이 ‘제로’라고 판단해 (학칙 개정안을) 상정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난 4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시스템 반도체 비전과 전략’을 발표하면서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을 골자로 하는 전문 인력 양성을 중점 추진 과제로 제시했다. 계약학과란 기업이 학생들에게 장학금과 학과 운영비를 지원하고, 졸업생을 100% 채용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학과다.

정부의 계획 발표 이후 연세대는 삼성전자, 고려대는 SK하이닉스와 각각 손잡고 2021학년도부터 반도체 계약학과 신입생을 모집키로 했다. 서울대의 경우 공대 교수들은 “이젠 대학도 사회와 기업들의 요구에 적극 부응해야 한다”며 대체로 찬성했다. 반도체 계약학과 설립 학칙 개정안이 최근 공대 교수회의를 통과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인문사회계열 교수들을 중심으로 “특정 기업 취직만을 위한 학과 개설은 서울대의 인재양성 철학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집중적으로 냈다. 서울대 공대는 이에 따라 반도체 계약학과 대신 ‘플랜B’를 마련해 삼성전자·SK하이닉스측과 협의를 진행중이다.

서울대 공대가 추진 중인 플랜 B는 ‘반도체 전공 트랙(가칭)’ 운영을 말한다. 컴퓨터공학부, 전기·정보공학부, 재료공학부, 화학생물공학부, 물리학부 등의 이공계열 학과가 협업해 반도체 전문 융합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협의해 트랙과목을 운영하고, 기존 학부생이 이 트랙을 이수하면 삼성전자가 채용하는 방식이다. 트랙 신설은 학칙을 개정할 필요가 없어 비교적 손쉽게 운영이 가능하다. 반도체 전공트랙은 학비 지원이 없는 대신 졸업생들은 반드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에 취업해야 한다는 ‘강제조항’도 없다. 차 학장은 “서울대의 교육 철학을 지키면서도 산업계의 요구를 반영한 최선의 대안”이라며 “총장에게 보고를 마쳤고, 트랙 운영비 지원에 대해 삼성전자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트랙 과정은 새로 전공을 신설하는 것보다 전문성과 이수 학점이 적을 수밖에 없어 안정적인 인력 수급이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서울대의 반도체 계약학과 무산 소식에 업계에서는 불만을 쏟아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대학이 연구개발과 함께 인재양성의 역할도 해야 하지만, 산업현장에 필요한 인력양성엔 상대적으로 소홀하다”며 “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조차 인력수급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어 산업현장의 어려움이 크다”전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반도체 계약학과가 아니라도 반도체 인력을 키울 수 있는 노력이 다각적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대학들이 재정적 어려움을 호소하면서 매번 기업에게 금전적 지원을 요구하지만, 정작 기업이 필요로 할 때에는 외면하고 있다”며 “반도체가 한국 사회에서 갖는 의미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대학들의 책임있는 모습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의진/김동윤 기자 justj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