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한국 기업인들의 '전생 업보론'
정부서울청사 인근에서 한정식 음식점을 40년 넘게 운영한 노(老) 여사장 회고담이 떠오른다. “식탁 상석의 주인공들은 길어 봤자 2~3년마다 바뀌는데, 문간 자리에 앉아 음식값을 계산하는 사람은 거의 그대로더라.” 상석을 꿰차는 사람들은 정치인·공무원·대학교수 등 ‘완장(직업)’이 다양하지만, 말석의 주인공은 십중팔구 기업인이었다는 점도 그의 뇌리에 인상 깊게 박혀 있다.

부정청탁금지법(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풍경이 달라졌다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기업인들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상석의 주인공들이 먹고산다는 사실 말이다. 기업이 더 많은 재화를 생산·판매하고 유통해야 투자·고용·납세 등의 경로를 통해 사회에 흘러나오는 돈이 늘어난다는 건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바뀌지 않은 게 또 있다. 그런 기업인들을 얕잡아 보는 우리 사회의 현실 말이다. 조선시대 거상(巨商) 임상옥과 김만덕으로 하여금 장사를 때려치우고, 돈 주고 산 벼슬로 한풀이를 하게 했던 사농공상(士農工商) 적폐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스티브 잡스 전 애플 CEO는 미래를 보여줬지만 이해진 전 네이버 이사회 의장은 그런 걸 제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아무것도 없이 맨몸으로, 정부 도움 하나 없이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의 인터넷 기업을 일으킨 기업가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은 오만하다”(이재웅 다음 창업자)는 비판에 김 위원장은 “자중하겠다”며 깨끗이 물러섰다. 하지만 기업인들을 대하는 지식인 사회와 권력집단의 단면을 본 것 같아 씁쓸했다.

김 위원장은 잡스가 “독재자 스타일이지만 (미래를 보여줘) 존경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기업 활동을 했더라도 그런 평가를 받았을 것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잡스는 공급업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하루아침에 거래를 끊으라고 지시했는가 하면, 무능력을 이유로 직원들을 수시로 해고해 악명을 떨쳤다. 주차장에 차를 세울 때 “난 바쁜 사람”이라며 대놓고 장애인 주차구역을 이용한 뻔뻔함으로도 유명했다. 한국에서 그랬다면 업적을 쌓을 틈도 없이 쫓겨나고 말았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잡스가 기업 활동을 옥죄는 온갖 규제가 첩첩이 쌓여 있는 한국에서도 ‘영웅’이 될 수 있었을지, 고개를 젓는 사람들이 많다. 아산나눔재단은 두 달 전 ‘스타트업 정책 제안’ 발표회에서 “전 세계 상위 100개 글로벌 스타트업이 한국에 들어오면 13곳은 사업을 시작할 수조차 없고, 44곳은 사업조건을 바꿔야 규제를 통과할 수 있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세계 최대 자동차 공유업체인 우버는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숙박 공유업체 에어비앤비는 공중위생관리법에 저촉돼 한국에서는 절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내놨다.

이 땅의 권력엘리트들이 한국의 미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기업가들이 마음껏 창의를 발휘해 국가재정에 더 많이 기여하고, 지속가능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 내도록 환경을 정비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할 것이다. 정치인이나 관료, 지식인들과 달리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인들은 매순간 생존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한다. 잠시의 방심과 실수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고 몰락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진다.

“경영이란 사방에 암초가 숨어 있고, 시도 때도 없이 폭풍이 휘몰아치는 망망대해를 건너야 하는 배의 운항과도 같다”고 한 경영 구루 패트릭 렌치오니의 말을 접하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업인이 많다. 언제 어떤 경쟁자가 나타날지, 언제 새로운 제품과 트렌드가 등장해서 사업의 판이 바뀔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절박함을 안고 사는 게 기업 경영자들의 숙명이다. 한국에서는 여기에 더해 ‘완장’들의 멸시를 견디고 모셔야 하는 고통이 더해진다. “전생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업(業)을 씻으라고 기업인으로 태어나는 것 아니겠느냐”는 자조와 한탄이 나오는 나라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