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첨성대 습격사건
400여 년 전인 1604년 10월, 엄청나게 밝은 별이 하나 반짝였다. ‘뱀주인자리의 발’ 부분에서 폭발한 초신성(超新星·소멸 직전 강렬한 빛을 내면서 폭발하는 별)이었다.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했다고 해서 ‘케플러 초신성’으로 불린 그 별이다.

케플러보다 나흘 앞서 이 별을 발견하고 상세하게 관측한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밤 1경(저녁 8시)에 객성(客星·초신성)이 미수(尾宿) 10도의 위치에 있었는데 북극성과는 110도의 위치였다”(선조 37년 9월21일, 양력 1604년 10월13일)는 내용이다. 이런 기록은 다음해 4월23일까지 130회나 이어진다. 과학계는 1966년에 공개된 이 자료 덕분에 케플러 데이터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최대 밝기를 규명할 수 있었다.

조선 천문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것은 1400년대 초였다. 세종 때 경복궁 경회루에 간의대(簡儀臺)를 세우고 혼천의(渾天儀)로 천체를 관측했다. 독자적인 천문역서 칠정산(七政算)도 이때 편찬했다. 별자리를 관찰하던 조선 시대 관천대(觀天臺)가 지금의 창덕궁 옆 현대건설 본사 자리에 있다. 그 위의 네모진 돌을 소간의대(小簡儀臺), 속명으로 첨성대(瞻星臺)라 불렀다는 기록(서운관지(書雲觀志))이 있다.

고려 때도 첨성대가 있었다. 개성 만월대 서쪽에 축대가 아직 보존돼 있다. 919년(고려 태조 1년) 연경궁 건축 때 축조한 것으로 보이는 이 첨성대는 네모난 주춧돌 5개 위에 화강석 기둥을 세우고 돌마루를 깐 형태다. 돌마루와 기둥에는 관측기구 설치에 사용한 구멍들이 뚫려 있다.

신라의 경주 첨성대는 7세기에 지은 국내 최고(最古)의 천문대다. 삼국유사에 선덕여왕 시절 쌓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당시 첨성대는 점성대(占星臺)로도 불렸다. 비슷한 시기 일본에서도 점성대(일본서기)라는 표현이 나온다. 고대 왕들은 국가의 길흉을 점치는 점성술(占星術)을 중시했다. 농사 시기도 하늘의 움직임에 따라 결정해야 했다. 정치뿐만 아니라 나라 경제와 직결되는 만큼 천문대는 왕과 가까운 곳에 있어야 했다. 첨성대가 높은 산이 아니라 왕궁 옆의 넓은 평지에 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이렇게 중요한 첨성대이지만 세월 따라 수난도 많이 겪었다. 고구려 때 평양에 있었다는 첨성대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고려 첨성대는 축대만 남았고, 조선 초기 첨성대는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국보 제31호인 경주 첨성대도 차량 진동과 지진 등으로 이런저런 상처를 입었다. 엊그제 밤에는 술 취한 여대생 3명에게 ‘기습 점령’까지 당했다. 국보 1호 숭례문 참사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한 나라의 정치·사회 수준은 민도(民度)와 비례한다는데….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