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아언각비] '그녀'를 위한 변명 (1)
“여성 3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그녀’라는 말은 ‘그년’과 혼동돼 흔히 우스갯소리가 되고 있다. ‘그녀는…’을 읽을라치면 ‘그년은…’이라고 들리는 것이다. 소설가 박영준 씨는 최근의 작품에서 ‘그녀’ 대신 ‘그미’라는 새말을 썼다.”

1963년 12월12일자 신문에 실린 기사의 한 대목은 반세기 전 치열했던 ‘그녀’ 논쟁을 잘 보여준다. 흔히 쓰는 우리말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논란이 돼온 말은 ‘그녀’일 것이다. 개화기 때 신문물이 들어오면서 ‘그’와 함께 태어난 이 말은 대략 1910년대 후반 문학작품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글말에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은 그 뒤 40여년이 지난 6·25전쟁 이후다. 하지만 그 뒤에도 ‘반(反)그녀’파의 반격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갑론을박을 지속하고 있다. 무려 100년 이상 논쟁의 화두가 된 셈이다.

‘그녀’의 출신성분은 좀 복잡하다. 애초 우리말에 3인칭 대명사가 없었기에 영어의 ‘she’를 옮길 말이 필요했다. 우리보다 앞서 19세기 말 일본에서도 같은 고민을 했는데 이들은 ‘彼女(가노조)’를 만들어 썼다. 이것을 그대로 들여와 옮긴 게 ‘그녀’다. 영어에서 왔지만 일본과 중국, 한국 고유의 요소가 뒤섞였다. 그것이 빌미가 됐다. ‘그녀’라는 말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하자 일본말 잔재인 ‘그녀’를 무분별하게 쓴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일었다.

논란의 정점은 1960년대였다. ‘그녀’를 마뜩지 않게 여기는 쪽에서 비판이 이어지자 《현대문학》은 1965년 3월호에서 ‘그녀’의 타당성을 집중적으로 검토하는 특집을 실었다. 최현배, 이숭녕, 허웅, 김동리 등 내로라하는 국어학자와 작가 등 7명이 참여했다. 당시 ‘그녀’는 이미 문인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그녀’를 비판하는 진영에선 이 말이 첫째 조어법상 맞지 않고, 둘째 일본의 ‘가노조’를 흉내낸 번역투이며, 셋째 음운상 듣기 거북하다는 점을 들었다(고길섶, 《우리시대의 언어게임》). 이들은 대안으로 ‘그미, 그네, 그니, 그매, 그히, 그냐’ 등을 제시하고 써보기도 했지만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다.

지난주 98주년 3·1절을 맞아 우리말 속 일본어 잔재에 관한 비판이 다시 제기됐다. 이제 ‘그녀’를 일어투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할 때가 됐다. 인위적으로 말글 사용을 제한하기보다는 ‘언어의 자유시장’에 맡겨 스스로 걸러지게 하는 것이 우리말을 키우는 길이다.

홍성호 기사심사부장 hymt4@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