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배임죄 재판, 경영상 판단 고려해야"
“기업인이 경영판단(결정)을 할 때는 반드시 충분한 재량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가로서 경영상의 결정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죠.”

법경제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 한스 베른트 샤퍼 독일 함부르크대 부체리우스법대 명예교수(사진)는 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국경제신문과 인터뷰를 하고 이같이 말했다. 샤퍼 교수는 한국경제연구원이 이날 주최한 국제심포지엄(기업활동에 대한 과잉범죄화) 행사에서 기조연설을 하기 위해 방한했다. 그는 독일 보훔대에서 법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럽법경제학회 회장, 함부르크대 법경제연구원 원장, 유럽법경제 마스터 프로그램 원장 등을 지냈다.

샤퍼 교수는 “기업 경영에 필수적인 기업가정신을 위축시키지 않으려면 사법부가 기업인에 대해 배임죄 등 판결을 내릴 때 경영상의 판단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현령비현령’ 식의 한국 배임죄는 법 자체가 모호한 데다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는 1997년에 이어 2011년에도 경영상의 판단을 인정, 배임죄로 기소된 기업인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독일 연방대법원 판결을 소개했다. 1997년 독일 보험회사 아락(ARAG)의 대표이사는 회사의 매출이 꾸준히 늘어나자 다른 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새로운 사업에서 손실이 나자 그는 주주의 이익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배임죄로 기소됐고, 독일 연방대법원은 무죄 판결했다. 기업인이 경영판단을 할 때 충분한 재량을 갖지 않으면 경영상의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샤퍼 교수는 “이 판결은 기업인의 배임 소송에서 분수령을 이룬 결정”이라며 “무모한 결정이 아니라면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기업인에 대한 지나친 처벌이 기업 경영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경영자가 안전한 사업만 추구하면 결과적으로 국가 전체 경제에 손해를 입히게 된다고 경고했다. 샤퍼 교수는 경영자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경우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한 사업은 안전하게 연 6%의 수익을 내고 다른 사업은 실패할 확률은 더 높지만 성공하면 연 50%의 수익을 얻는 경우를 상정했다. 그는 “(기업인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에 뛰어드는 것이 맞다”며 “그렇지 않고 모두 안전한 결정만 내린다면 창조적 혁신은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국 형법에서 배임죄가 손해 발생의 위험만 있어도 처벌되는 점 역시 문제라고 했다. 독일은 손해가 발생한 경우에 한해서만 형사적으로 처벌한다고 설명했다. 샤퍼 교수는 “사법부의 판사들이 이런 사안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기업 거래와 경영 환경 등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또 어려움에 처한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자금을 지원해 회사를 정상화시킨 것을 배임죄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샤퍼 교수는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사법처리 사례에 대해 설명을 들은 뒤 “김 회장이 계열사를 살리기 위해 자금을 지원한 것은 경영상의 판단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김 회장의 사례가 독일에서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잘못된 기업행위를 효과적으로 억제하는 방법으로는 신체를 구속하는 징역형이 아니라 벌금형을 제시했다. 한국과 같이 선진국으로 들어선 나라는 범죄 억제를 위해 징역형보다 벌금형이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샤퍼 교수는 “벌금형이 실질적인 효과를 보려면 피고인의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 액수를 달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서 김일중 성균관대 경제학부 교수는 ‘한국 과잉범죄화:공정거래법 사례를 중심으로’란 주제발표를 통해 “한국은 행정규제의 과다한 적용으로 규제범죄자를 양산하는 과잉범죄화 현상이 심각하다”며 “공정거래법 위반 등을 이유로 국민의 5분의 1, 성인의 4분의 1 이상이 전과자로 내몰리고 있다”고 우려했다.

배석준 기자 eul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