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신용평가회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5일 오후(현지시간)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들의 신용등급을 한꺼번에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S&P는 지난 8월5일 미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리며 ‘설마’ 하던 시장을 폭락으로 이끈 장본인이다. 이번엔 15개국을 ‘부정적 관찰’ 대상에 포함시키며 금융시장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갑작스런 S&P의 경고는 다양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필 유로존 재정위기가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시점에 맞춰 찬물을 끼얹느냐는 비판이 있는가 하면, 오는 8~9일 유럽연합(EU) 정상회의를 앞둔 ‘압박용 카드’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러 분석 중 눈길을 끄는 것은 신용평가사들에 쏟아질 비판에 대비한 ‘안전장치’라는 관점이다. S&P는 경쟁사인 무디스와 함께 2008년 금융위기 때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느슨한 평가로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태도는 최근 유로존 재정위기 확산으로 다시 도마에 올랐다. “나중에 유로존 국가에 대해 뒷짐만 지고 있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방어막을 쳤을 수 있다”는 게 국내 신평사 관계자의 해석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동시다발적인 등급 강등 경고는 상당히 효과적인 방법이다. 개별 평가 대상국의 저항을 최소화하면서도 신평사의 성향을 ‘공격적(aggressive)’으로 보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나라 신평사들도 같은 방법으로 신뢰를 회복한 경험이 있다. 리먼브러더스 파산 직후인 2008년 12월 급격한 유동성 악화에도 불구하고 건설업 신용등급을 조정하지 않은 데 대한 불만이 한층 고조됐을 때다. 국내 신용평가 3사는 1주일에 걸쳐 38개 건설사의 등급(전망)을 떨어뜨렸다. 뒤늦은 조정이라는 비판이 잇따랐지만 적어도 신평사 입장에선 건설사 채권금리와 신용등급 간 괴리 확대에 따른 불만을 해소하고, 악화일로에 있던 신뢰도를 끌어올린 효과적인 카드였다.

유럽 주요국들의 국채금리가 이미 신용등급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뛰어오른 상황에서 S&P의 뒤늦은 경고가 어떤 파급효과를 불러올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과와 상관없이 유로존 위기 경고에 실패한 S&P에 일종의 ‘면죄부’로 활용될 것 같다는 사실은 씁쓸하기 그지없다.

이태호 증권부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