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오스카 와일드)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그레이,얼굴 찡그리지 말게나. 자네는 진실로 아름다운 얼굴을 갖고 있어.아름다움은 천재성의 한 형태일세.아니 천재성보다 한 수 위라고 할 수 있어.왜냐하면 아름다움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 '

순진한 청년 그레이를 쾌락에 물들도록 만든 헨리경(卿)의 말은 아름다움이 어떻게 해서 권력으로 변할 수 있는지,왜 때로 미가 덕에 앞서는지 알려준다. 이러니 남자들의 로망 중 하나가 '영웅본색'같은 액션물 주인공이라면,여자의 로망 가운데 수위는 화장품 모델이다.

당대 최고의 미인으로 인정받는 일이니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에 품는다. 천하의 경국지색도 나이 들면 어쩔 수 없다고 전 같으면 30대만 돼도 언감생심 꿈도 꾸기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국내외 할 것 없이 마흔 안팎 여배우들이 화장품 모델로 나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국내의 경우 김희애(43) 이영애(39)씨에 이어 김혜수(40) 이미연(39) 이승연(42)씨 등이 가세했다. 또 줄리아 로버츠(43)는 랑콤의 전(全) 브랜드 공식모델로 선정됐다. 1990년 '귀여운 여인'으로 유명해진 로버츠는 2002~4년 편당 출연료만 2000만달러 이상 받는 최고의 여배우였다.

그런 그도 마흔 살이 넘으면서'해리 포터'시리즈 속 헤르미온느 역으로 뜬 엠마 왓슨에게 '최고 흥행 여배우' 자리를 넘겨줬다. 배우로선 전성기가 지난 듯한 시점에 화장품 모델로 발탁된 셈이다.

화장품 모델에 나이든 배우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주름과 잡티 제거 등 노화 방지를 내세운 기능성 화장품이 늘어난데다 젊음의 풋풋함보다 세련되고 우아한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쪽으로 추세가 바뀐 까닭일 수도 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나이듦에 대한 인식이 바뀐 것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줄리아 로버츠는 나이 들자 과거 당연하게 여겼던 일에서 감사와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털어놓으면서 아름답게 늙는 비결로 '활기차고 긍정적인 생활'을 꼽았다.

왜 아니랴.젊음과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영혼의 몰락을 방기하다 파멸한 도리언 그레이는 죽음에 앞서 이렇게 고백한다. '젊음이란 게 무엇이던가. 설익은 시간,얕은 감정과 병적인 생각의 시간이다. '40대 화장품 모델의 얼굴을 닮으려는 노력 못지 않게 아름다운 영혼을 가꾸기 위해 애쓸 일이다.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